불편한 일을 만나도 자유롭게 살게 하시려고
불편한 일을 만나도 자유롭게 살게 하시려고
  • 김광운 (베냉 선교사)
  • 승인 2014.03.04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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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수기

 

‘아니, 저런 자세로 어떻게 잠을 잘 수가 있지?!’
아프리카에 와서 살면서, 베냉 사람들의 삶과 다른 내 기준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았다.
베냉에서 가나에 가려면 토고를 거쳐서 가야 하는데, 교통수단으로 보통 택시를 이용했다. 한번은 아내와 함께 택시 뒷좌석에 탔는데, 운전사 옆 좌석에는 벌써 한 사람이 타고 있었다. 차가 달리다가 얼마 후 한 사람이 손을 들자 서더니, 우리 부부 옆으로 여자 분이 탔다. 뒷좌석에 세 사람이 탔으니 차에 손님이 다 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차가 또 서더니 운전사 옆에 한 사람이 더 탔다. 먼저 탄 사람은 기어 박스가 있는 곳에 엉덩이를 올린 후 등을 운전사 쪽으로 비스듬히 향하였다. 나중에 탄 사람이 오히려 편하게 자리를 잡은 것이다.
택시가 다시 달리다가 손님이 손을 들자 또 멈추었다. 그 여자 손님은 우리가 앉아 있는 뒷좌석에 타려고 했다. 그런데 몸집이 보통 아프리카 사람의 두 배는 되었다. ‘아, 저 사람이 타면 우리는 정말 큰일이다!’ 그 사람은 택시에 쉽게 올라타지 못했다. 그러자 운전사가 내리더니 뒷문 쪽으로 가서 그 사람을 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발이 차 안으로 들어가자 문을 힘껏 밀어서 닫아버렸다.
아내와 나는 불평을 해댔다. ‘택시 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태우다니…!’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일 앞에서 계속 불평이 터져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더운데,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네다섯 시간을 달려서 토고까지 가야 할 것을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나님, 이게 뭡니까?’ 결국에는 하나님에게까지 불평이 나왔다.
30분쯤 지나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운전사 옆에 있던 사람, 기어 박스가 있는 곳에 앉아 있던 사람이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면서 깊이 잠을 자는 게 아닌가! ‘아니, 저런 자세로 어떻게 잠을 잘 수가 있지?!’ 비록 뒷자리가 비좁아서 불편하긴 하지만 그 사람만큼 불편하지는 않았다. 불편한 것으로 따지자면 그 사람이 더 불평을 해야 했다. 그런데 그는 깊이 자고 있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이 내 머리를 탁 때리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너, 지금 왜 불평하는데? 불편해서 불평하는 게 아니라 지금 네가 갖고 있는, 한국에서 가지고 살던 기준 때문에 불평하는 거야. 한국의 기준으로 아프리카에서 살려고 하니까 어려운 것이지, 아프리카의 기준으로 살면 저런 상태에서도 잠을 잘 수 있는 거야. 지금 네가 어디에서 살고 있지? 한국에서 살고 있어, 아프리카에서 살고 있어? 이곳에 선교하러 왔으면 이곳 기준을 따라야지, 왜 한국의 기준으로 살려고 해? 한국의 기준으로 살려면 한국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그제서야 마음이 바뀌었다.
‘하나님, 그렇습니다. 이곳에 선교하러 왔으면 이곳 기준으로 살아야지요.’
마음을 바꾸어 한국의 기준을 내려놓고 보니 갑자기 불평이 다 사라졌다.
‘아, 아프리카에서는 이렇게 택시를 타고 다니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구나. 당연하구나!’
생각이 바뀌니까 마음이 아주 편해졌다. 하나님은 내가 형편이 불편해서 어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기준 때문에 어려워하는 것임을 분명히 가르쳐 주셨다.

 
“아주머니! 이게 뭐예요? 왜 반질반질한 동전을 줘요?”
베냉 사람들은 하루 세 끼를 똑같은 음식을 먹지 않는다. 아침에는 죽 종류인 ‘부이’와 빵을 먹고, 점심에는 쌀밥을 먹고, 저녁에는 옥수수를 갈아서 만든 ‘빠뜨’를 먹는다. 우리는 아침에 보통 바게트 빵을 사서 커피와 함께 먹는다. 아침에 빵공장에서 나온 따뜻한 빵이 굉장히 맛있는데, 아주머니들이 갓 구운 빵을 주로 학교 앞에서 많이 판다.
 
하루는 우리 집 앞에서 한 아주머니가 빵을 팔고 있었다. 그래서 빵을 여러 개 집은 후 100세파 동전 몇 개를 주었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어떤 동전은 받고 어떤 동전은 받지 않았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주머니는 불어를 모르고 토속어만 할 줄 아는 분이었기에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토속어로 소리를 지르면서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째서 그렇게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물어 보고서야 이유를 알 았다. 베냉 사람들은 동전을 손으로 만져서 거칠거칠한 것만 돈으로 여기고 반질반질한 것은 돈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한국 기준으로는 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아니, 동전이면 되지 왜 거칠거칠한 동전만 받아?’ 하지만 베냉에서는 통하지 않는 생각이었다. 또 내 기준을 버리고 베냉의 기준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하루는 어느 형제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말씀을 전하러 가다가 기름이 부족해서 기름 한 병을 샀다. 베냉에서는 길가에서 기름을 판다. 기름을 파는 아주머니에게 돈을 주고 거스름돈을 받으려고 기다리는데, 아주머니가 빨리 주질 않았다. “아주머니! 우리 지금 바빠요. 빨리 거스름돈 주세요” 하고 재촉하니까 아주머니가 동전 여러 개를 나에게 건넸다. 보니까 반질반질한 동전들이었다. 그런 동전들을 모아놓았다가 다 나에게 준 것이다. 내가 외국인이니까 ‘잘 모르겠지’ 하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아주머니! 이게 뭐예요? 왜 반질반질한 동전을 줘요? 빨리 바꿔주세요!” 하고 소리쳤다. 아주머니는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얼른 바꿔주었다.

그날, 자매를 향하여 들고 있던 돌을 내려놓았다
우리 교회에 나오는 형제 자매들이 몇 명 되지 않던 때의 일이다. ‘로’ 자매가 구원받은 후 다니던 교회에서 나와 우리 교회 모임에 나오기 시작했다. 로 자매는 남편 없이 한 아이를 기르고 있었다. 자매는 곧 교회에서 찬송을 인도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찬송 인도자 없이 몇몇 형제 자매들이 소리를 맞추어 찬송하다가 자매가 찬송을 인도하니까 형제 자매들이 잘 따라 불렀다. 거의 매일 저녁 모임이 있었기에 자매는 매일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하루는 로 자매가 나에게 찾아와서 “직장을 잡았는데 오전 11시에 일을 시작해서 새벽 1~2시까지 일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오전에 선교학교 수업 시간에 참석해 말씀을 듣고 직장에 가고 싶다고 했다. 오랫동안 직장 없이 살았기에 일을 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 자매는 오전에 말씀을 듣고 직장에 가서 일하고, 저녁에는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일 예배에 참석했다. 그렇게 3개월 가량 지났을 때, 다른 형제 자매들이 로 자매가 지금은 직장에 다니지 않고 집에서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직장을 그만두었으면 교회에 와야지, 왜 집에 있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자매는 직장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옛날에 알고 지내던 남자와 만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부터 그 사람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 일이 부끄러워서 교회에 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구원받은 자매가 교회도 모르게 옛날 남자 친구를 만나고 같이 살면 안 되지! 저런 자매가 교회에 나오면 다른 형제 자매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어. 저런 사람은 교회에 나오면 안 돼! 그래, 로 자매는 교회에 나오지 말고 그냥 집에 있는 것이 나아.’
내 속에 이런 강한 기준이 있었다. 형제 자매들에게도 로 자매 집에는 찾아가지 말라고 했다.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요한복음 8장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돌을 들고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고 묻는 장면에 마음이 머물렀다. 예수님께 그렇게 묻고 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바로 나임을 주님이 보여 주셨다. 돌을 들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내가 자매를 향하여 돌을 들고 있는 모습과 똑같았다.
예수님도 그 여자를 향하여 돌을 들었는가? 예수님은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씀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옳지 않았던 것이다. 나 역시 옳지 않았다. 나는 그날 자매를 향하여 들고 있던 돌을 내려놓았다. 예수님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받으신 것처럼 내 마음에서도 로 자매를 받을 수 있었다. 형제 자매들에게 자매 집에 찾아가라고 하고, 자매의 남자 친구도 만났다. 남자 친구는 자매가 복음을 전해서 벌써 구원받은 상태였다. 만약 내가 내 기준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면 두 사람 모두 잃었을 것이다.

‘불성령’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
신앙에 있어서는 이곳 사람들의 관념이 잘못된 것이 많다. 아프리카에서는 ‘불성령’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푸! 푸(feu, 불)!” 하면서 불을 받으면 성령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성경에서 불을 받은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엘리야 선지자가 기도할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운 일은 있지만 불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마태복음 3장에서 세례 요한이 ‘나는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불성령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성경에는 ‘불성령’이라고 기록된 것이 아니라 ‘성령’과 ‘불’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붙여서 ‘불성령’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다. 목사들도 불을 받으라고 외치고, 사람들은 불을 받으면 성령을 받는다고 생각해서 불성령을 받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사실 불은 알곡이 아닌 쭉정이를 태우는, 곧 영원한 심판의 불을 의미하는 것인데 말이다. 사탄이 그처럼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사람들에게 마태복음 3장 말씀을 보여 주며 그 뜻을 정확히 설명해 주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 이곳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물’을 ‘세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례를 받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목사들도 그렇게 가르친다. 그런 모습을 보면 너무 안타깝다. 그 물은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말이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아갈 때
창세기 27장에서 이삭은 축복을 주기 위해 맏아들 에서를 불렀다. 에서에게 별미를 만들어서 가져오면 그것을 먹고 축복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모든 축복을 야곱이 받았다. 나중에 에서가 이삭 앞에 와서 복을 내려달라고 했을 때, 이삭은 더 이상 줄 축복이 없다고 하며 저주를 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삭은 맏아들 에서를 사랑했고, 그를 축복하려고 했다. 그런데 야곱이 모든 축복을 받는 것을 보면서 깊이 생각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셨을까? 에서가 맏아들이고 남자다워서 나는 에서를 사랑했는데, 하나님은 왜 야곱이 축복을 받도록 하셨을까? 아, 내가 틀렸구나! 내가 어리석었구나! 나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에서를 사랑했고, 에서에게 축복을 주려고 했구나.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셨고, 야곱에게 축복을 주려고 하셨으며, 결국 야곱이 축복을 받게 하셨구나!’
이삭의 마음에서 진정한 회개가 이뤄진 것이다. 그 후 창세기 28장 1절에서 이삭이 에서를 부르지 않고 야곱을 부른다. 전에는 자기 기준, 자기 눈으로 보는 것을 따라서 살았는데,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제는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눈을 좇아서 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도 아프리카에 살면서 내 기준을 따라, 내 눈으로 본 것을 좇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조금씩 내 기준을 버리게 하시고, 내 눈도 버리게 하시는 것을 본다. 하나님 앞에서 내 기준을 버리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아갈 때 불편한 일을 만나도 불평하지 않고 자유롭고 복된 삶을 살 수 있다. 이곳 아프리카에서 그런 삶을 배우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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