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36) - 진리를 사랑한 순교자, 얀 후스(Jan Hus) Ⅱ
교회사(36) - 진리를 사랑한 순교자, 얀 후스(Jan Hus) Ⅱ
  • 이한규 (기쁜소식동서울교회 목사)
  • 승인 2014.03.04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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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36회)

 

콘스탄츠 종교회의의 음모
얀 후스는 보헤미아의 민족 지도자이기도 했다. 당시 보헤미아는 독일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보헤미아 인들은 독립을 원했다. 독일인들은 주로 로마카톨릭 신자였고, 보헤미아 인들은 조상들처럼 자국어로 예배 드리기를 원했다. 민족적 갈등은 종교 갈등으로까지 번졌고, 후스는 보헤미아 인들을 위해 민족적 개혁의 지도자로 그들의 정면에 등장하는 상황이 되었다.
후스는 성직 매매 등 교회의 타락을 질책했고, 교황의 권한은 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보헤미아에서 그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교황청의 심기는 불편했고, 그의 입을 막을 기회만 노렸다.
그 즈음 헝가리의 ‘지기스문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권좌를 정당화하는 동시에 보헤미아의 권좌까지 얻고자 했다. 그는 교황에게 종교회의 소집을 요청하여 그 두 가지 문제를 풀고자 했다. 지기스문트의 요청을 받은 로마카톨릭은 후스를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교회의 일치와 개혁’이란 명분 아래 1414년 독일 남단의 콘스탄츠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했다. 당시 서유럽에는 세 명의 교황이 공존했는데, 로마의 교황 그레고리, 아비뇽의 교황 베네딕트, 그리고 피사 종교회의에서 선출된 교황 알렉산더였다. 세 사람은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며 상대방을 ‘대립 교황(anti-pope)’이라고 비난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이러한 분열을 해결하자는 명분 아래 소집된 것이다.
종교회의는 ‘이단자인 위클리프와 후스가 가진 사상의 관련성을 조사한다’는 이유로 후스를 소환했다. 후스의 친구들은 그 뒤에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을 간파하고 후스가 콘스탄츠에 가는 것을 한사코 만류했다. 그러나 후스는 그곳에서 있을 논쟁에 대비해 그의 입장을 준비한 후 콘스탄츠로 향했다.

 

공의회에 참석하기 전에 보낸 후스의 편지
회의에 참석하기 전 후스는 프라하에 있는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박사들, 사제들, 영주들, 기사들, 그리고 대중에게 숨겨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공개적으로 나의 견해를 밝힐 것이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기소하는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응답할 것이다.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과 그의 진리를 위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왕의 통행권을 가지고 많은 대적들을 만나려고 가고 있다. 나의 구주가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긴다. 내가 능히 저들을 대항할 수 있도록, 나의 입에 하나님의 지혜와 그분의 신중한 정신을 넣어 주시기를 간구하는 그대들의 열렬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줄로 나는 믿는다.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진리로 강하게 하시기 위하여 성령을 주시고, 시련이나 감옥에 가는 것이나 필요하면 잔인한 죽음까지도 용기 있게 감당하게 하실 줄로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다.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일에 참을 수 있도록 본을 보여 주셨으니, 이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분께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우리는 비천한 인간들이다. 그런데 그분께서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고난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더욱이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정결해지는데, 어찌 고난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즉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만일 나의 죽음이 주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된다면 그날이 속히 이르도록, 그리고 내가 당하게 될 모든 고난에 주께서 항상 나를 붙들어 주시도록 기도하라. 만일 내가 그대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더욱 좋은 일이라면 나로 하여금 오점 없이 돌아가게 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라. 곧, 나의 형제들에게 훌륭한 본을 남겨 나를 좇게 하도록, 복음의 진리를 일점 일획이라도 숨기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아마도 프라하에서 그대들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이 나를 돌아가게 허락해 주신다면, 그때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과 지식과 사랑으로 마음을 더욱 굳게 하여 전진해야 할 것이다.”

체포되어 재판 자리에 선 후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지기스문트는 후스의 신변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편지를 써주었다. 그러나 후스는 보헤미아 왕과 왕비에게 편지를 써서 이단자로 형벌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후스는 보헤미아의 귀족 두 사람과 함께 콘스탄츠로 향했다. 그들은 후스의 제자들로, 존경심과 애정으로 후스를 따랐다. 그가 콘스탄츠로 가는 동안 사람들이 그의 곁으로 몰려왔으며, 어떤 마을에서는 지방장관이 그를 따라서 거리를 같이 걷기도 하였다.
후스는 콘스탄츠에 도착하자마자 체포되어 라인 강 근처에 있던 도미니카수녀원의 감옥에 감금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그는 명문대학의 총장이요, 최고의 지성인이요, 유럽의 유명인사였지만, 카톨릭교회에서는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단자일 뿐이었다. 이단자에게는 관용이 허락되지 않았다. 교황청에서는 후스에게 카톨릭교회에 대한 비판을 무조건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후스는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자신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종교회의가 확실하게 지적해 주지 않는 한 생각을 바꿀 수 없다’고 하였다.
독일 황제 지기스문트가 중재에 나섰지만 아무 성과가 없었다. 지기스문트는 추기경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후스를 처벌하라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후스에게는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거나 자신을 정죄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쓰지도 않은 글을 이유로 고소당했고, 이단자로 판결받았다. 후스는 변호사 선임을 요구했으나, 재판관들은 ‘이단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변호할 수 없다’는 법조항을 들어 후스의 요구를 거절했다. 또한 이단자로 출교당한 자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불법이라 하여, 후스는 낮에는 발에 족쇄를 차고 지내고 밤에는 선반에 묶여 있었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사람들은 먼저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정죄했고, 죽은 그의 시체를 다시 파서 불태우기로 결정했다. 그 후에 후스를 심문했다. 후스는 말도 안 되는 질문으로 공박을 받아도 글을 쓸 종이가 없어서 헝겊 종이에 자신의 사상을 나타냈다. 참고할 책도 없고 성경도 압수 당한 상태에서 건강마저 좋지 않았지만 그는 꾸준히 글을 썼다.

주장을 취소하든지 죽음을 택하라
후스는 열병과 굶주림과 추위로 극심한 고통 속에서 3개월을 보냈다. 1415년 3월 24일, 감옥에서 겨울을 난 후스는 라인 강변에 있는 고트리벤(Gottlieben) 성으로 옮겨졌다. 쇠사슬에 묶인 채 옮겨졌고, 옮겨진 후에도 벽에 달린 쇠사슬에 묶여 지냈다.
6월 5일, 75일 동안 감옥에 갇혀 있던 후스는 출혈과 두통, 그리고 갖가지 질병으로 인해 몸이 날로 허약해졌다. 그처럼 견디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도 그는 간수들에게 친절하게 대해, 간수들은 그의 친절과 인내심에 감복했다. 그리고 어려움 속에서도 후스는 친구들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썼다.
습한 감방과 불결한 공기 때문에 열병에 걸린 후스는 거의 죽음 직전 상태에서 대회의에 끌려나왔다. 그곳에는 교회와 정부의 높은 이들이 열지어 앉아 있었다. 그는 쇠사슬에 묶인 채로 황제 앞에 섰다. 후스를 비난하는 자들은 그를 조롱하고 폭언을 퍼부었다. 후스가 입을 열어 말하려고 하면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 후스는 침묵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 심문을 받았지만 후스는 확고부동하게 진리를 주장했다. “종교회의의 어떤 부분이 성경보다 우위에 있는지를 한 귀퉁이라도 보여 주면 지금이라도 나의 주장을 철회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성경과 반대되는 잘못을 고집스럽게 고수하는 것이 이단이라고 하였다. 그는 “나는 나의 양심에 거슬리어 아무것도 행할 수 없으며, 영혼의 구원에 반하여 행하지도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후스는 자신의 주장을 취소하든지 죽음을 택하든지 하나를 선택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진리를 위해 기꺼이 순교의 길을 택했다.
후스는 보헤미아에 있는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은 놀라운 편지를 보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후에 또 다른 사람들, 즉 적그리스도의 사악함을 나타내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도 아끼지 않을 사람들을 일으키시리라는 사실을 확고히 믿는다. 이런 사실로 우리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아멘.”

“기쁨으로 당신을 위하여 치욕의 관을 쓰나이다”
후스는 화형 당하기 2주 전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나는 마태복음 5장 11~12절 말씀,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크게 위로를 받는다. 이것은 가장 좋은 인사말이다. 그러나 어렵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이 아니라 행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이 말씀은 나에게 이러한 환난 가운데 기뻐하라고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큰소리를 읽고 상세하게 설명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말씀대로 따르기는 어렵다. (중략) 감옥에서 사슬에 묶인 채로 쓰다.”
하나님의 은혜가 후스에게 임해 그가 최후의 선고를 받기 전에 지낸 고난의 몇 주일 동안 그의 마음은 하늘의 평안으로 충만했다. 그는 한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했다.
“나는 옥중에서 내일 사형선고가 내려질 것을 기다리면서 쇠사슬에 매인 손으로 이 편지를 쓰네.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내세의 귀한 화평 중에서 다시 만나게 될 때, 그대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자비를 베푸신 것과 내가 당한 시련 중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도우셨는지 알게 될 것이네.”
공의회 자리에서 심문받던 후스의 옷이 하나씩 벗겨질 때마다 사람들은 의식을 행하고, 줄지어 앉아 있던 교회의 감독들은 차례로 저주를 선포했다. 후스는 무릎을 꿇은 채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당신에게 간곡히 간청합니다. 나를 모함한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 소리를 듣고 감독들은 험상궂은 인상을 지으며 비웃었다. 그들은 후스의 이마에 악마의 그림과 글을 적고,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맡기는 그림이 그려진 모자를 씌웠다. 그 앞면에는 ‘이단의 주모자’라는 글자가 뚜렷하게 쓰여 있었다.
자신의 주장을 취소하라는 권고를 다시 받은 후스는 군중을 향하여 돌아서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하늘을 쳐다볼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까지 순결한 복음을 전한 저 사람들을 무슨 면목으로 쳐다볼 수 있겠는가? 나는 이제 죽기로 작정된 불쌍한 나의 몸 이상으로 저 사람들의 구원을 귀중하게 여긴다.”
그리고 부르짖었다.
“주, 예수여! 이 종은 더할 수 없는 기쁨으로 당신을 위하여 치욕의 관을 쓰나이다. 나를 위하여 가시관을 쓰신 주 예수여!”
모든 과정이 지난 후, 주교는 “네 영혼을 마귀에게 주노라” 하고 말했다. 그때 후스는 하늘을 우러러
“오, 주 예수여! 당신이 나를 구원하셨으니 나는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 하고 말했다.

“입술로 전파한 것을 이제 나의 피로 증거하려는 것이다”
후스는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그는 무릎을 꿇고 시편 31편과 51편을 암송했다. 그의 뒤에는 무장한 수백 명의 사람들, 아름다운 옷을 입은 신부와 주교들, 그리고 많은 주민들이 따랐다. 화형주(火刑柱)에 묶인 후스는, 불을 붙일 준비가 다 갖추어진 후 목숨을 위해 자신의 잘못된 이야기를 취소하라는 권고를 다시 한 번 받았다. 그러나 후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무슨 오류를 취소하라고 하는가? 나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저술하고 전파한 것은 모든 사람을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증거한다. 나는 거짓 교리를 가르친 적이 없다. 내가 나의 입술로 전파한 것을 이제 나의 피로 증거하려고 하는 것이다.”
화형장에서 후스는 보헤미아 사람들이 모두 분명하게 들을 수 있도록 외쳤다.
“주, 예수 그리스도! 당신의 복음과 당신의 말씀을 전파하는 이유로 당하는 비참하고 처절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옵소서!”

불길 속에서 46세의 개혁자는 옛 찬송 한 구절을 불렀다
마지막으로 주장을 철회하라고 하려고 포펜하임(Poppenhaim)이 후스에게 다가가서 물었을 때, 후스는 최후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나의 증인이 되신다. 나에 대해 위증한 거짓 증인들이 말한 모든 죄목들을 나는 전파하지도, 가르치지도 않았다. 나의 설교들, 저서들에 나타난 나의 원리는 사람들을 죄로부터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복음에 대해 거룩한 박사들이 가르치고 해설한 그대로 나는 썼고, 가르쳤으며, 전파했다. 나는 오늘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후스의 이야기를 듣고 귀족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고, 나무 더미에 불을 던지라는 신호가 내려졌다. 집행관이 나무 더미에 불을 붙이자 화염이 치솟았다. 불길 속에서 후스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예수 그리스도여, 살아 계신 아들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차마 볼 수 없는 잔인한 장면이었다. 타오르는 불길 가운데에서 46세의 개혁자는 옛 찬송의 한 구절을 다시 불렀다. 바람에 의해 불길이 그의 온몸을 덮자 그의 영혼은 떠나갔다. 얼마 후 불길이 식자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쇠사슬에 묶여 있는 검게 탄 형체뿐이었다. 1415년 7월 6일의 일이었다.
그의 몸이 탄 재는 라인 강에 뿌려졌다. 보헤미아 사람들은 후스가 화형당한 곳을 성지로 여겼고, 그곳의 흙을 파서 고국으로 옮겼다. 후스를 대적했던 자들까지도 그의 영웅적인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 교황측의 한 사람은 후스와 그 후에 있었던 제롬의 순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두 사람은 최후의 순간까지 변함없이 확고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화형을 당하기 위하여 나아가기를 마치 혼인잔치에 나아가는 것같이 하였다. 그들은 아무런 고통의 부르짖음도 발하지 않았다. 불길이 일어날 때 그들은 찬송하기 시작했는데, 불길의 기세도 그들이 부르는 찬송을 그치게 할 수 없는 듯했다.”
후스와 같은 견지에서 후스의 입장을 대변했던 ‘히로니무스 폰 프라하’도 같은 이유로, 같은 방법에 의해, 같은 장소에서 화형대의 연기로 사라졌다. 지금도 독일 콘스탄츠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큰 바위가 그날의 비정한 사건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후스가 화형에 처해졌다는 소식이 보헤미아 지역에 전해지자 국민들은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 프라하대학은 총장의 죽음을 순교자의 죽음으로 선포했고, 후스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후스는 체코 인들이 가장 추앙하는 역사적 인물이며, ‘주님의 진리가 승리하리라!’는 그의 삶의 모토는 현재 체코공화국의 모토로 채택되었다.

“진리를 사랑하라. 진리를 말하라. 진리를 지키라”
후스의 생애와 사상은 한마디로 진리에 대한 탐구와 열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가 추구했던 진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신 사랑의 약속 가운데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가 화형되기 전에 남긴 글은 그가 전 생애를 통해 추구했던 진리가 무엇인지 증언하고 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여, 진리를 찾으라. 진리를 들으라. 진리를 배우라. 진리를 사랑하라. 진리를 말하라. 진리를 지키라. 죽기까지 진리를 수호하라. 그것은 진리가 너를 죄와 악마와 영혼의 죽음과 마침내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후스를 핍박했던 자들은 그가 전한 진리를 뿌리 뽑은 것처럼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외친 말씀은 각 나라에 씨앗처럼 뿌려져 진리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었다. 후스는 가고 없었으나 그가 생명을 바쳐서까지 옹호한 진리는 살아 있었다. 그의 신앙과 충성은 많은 사람들에게 고문과 사망을 당하면서도 진리를 위하여 굳게 설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후스가 처형된 후 그의 뜻과 사상을 이어받은 ‘보헤미안 형제단’이 형성되었고, 나중에 진젠도르프 백작의 지도 아래 ‘모라비안 형제단’이라는 그리스도교 분파가 생겼다. 이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복음이 체코 민중의 가슴에 심겨졌다. 후스의 진리를 향한 헌신, 말씀의 능력, 절제된 영적인 삶, 개혁을 향한 열정, 굳건한 성품, 책임성 등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후스의 일은 후에 루터에게 영향을 준다. 후스의 최후에 대해서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후스가 사형 집행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오늘 거위(보헤미아 말로 후스huss는 거위) 한 마리를 불사르려고 하지만, 1세기 후에는 불태울 수도 없고 삶을 수도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
마르틴 루터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100년 전에 후스가 말했던 백조가 드디어 나타났다고 믿었다. 루터는 1517년에 비텐베르크대학교 부속 교회당 정문에 ‘95개 조의 논제’라는 제목으로 면죄부 판매 등 카톨릭교회의 부당한 처사를 비판하는 문서를 게시했는데, 백조를 문장(紋章)으로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은 루터를 백조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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