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빛, 새 삶!
말씀, 빛, 새 삶!
  • 심홍섭, 정정숙
  • 승인 2014.06.03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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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간증

 
 
 

 

 
죽다 살아난 것이 감사해서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경남 합천의 시골 마을에서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나는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보냈다. 중학교 1학년 때 감나무에서 떨어졌는데, 겉이 멀쩡해서 다친 데가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피를 흘리고 이틀 동안 의식을 잃었다. 콩팥이 파열되었던 것이다. 경북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가망이 없다고 했다. 병원비가 너무 많이 나와서 완쾌되지 않았지만 도망나오듯 퇴원했다.
내가 아픈 일로 어머니는 교회를 찾으셨고, 나도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몸이 좋아졌다. 죽다 살아난 것이 감사해서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교회에서는 “아담이 지은 죄는 예수님이 씻으셨지만 우리가 짓는 죄는 회개하고 열심히 봉사해야 한다”고 했다.
교회를 다닐수록 죄의 짐이 더 커졌다. 실망도 커졌다. 합천의 유지인 교회의 어른들이 목사님과 돈 문제로 다투고, 교회가 찢어지고, 학생회의 신실해 보이는 선배들이 더러운 삶을 살고…. ‘인간이 선하게 살 수 없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절대적인 신, 하나님은 부정할 수 없었다. 죄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그냥 되는 대로 살았다.

‘심홍섭이는 안 되는가 보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 석 달에 한 번씩 내는 공납금을 제때 내지 못해 늘 서무실에 불려다녔다. 그런 삶이 싫어서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러 무작정 부산으로 갔다. 자동차 정비 일을 하던 사촌형을 만나 판금 기술을 배웠고, 1984년 스무 살에 합천으로 와서 자동차 도색(塗色)을 배웠다. 빨리 돈을 벌고 싶어서 한 곳에서 오래 일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렇게 덤비는 나를 이용했다. 그런 악한 사람들이 잘사는 것을 보며, 착한 것은 필요없고 권력이나 돈이 있어야 한다고 사고방식이 바뀌었다.
올라오는 생각대로 살다 보니 즉흥적으로 저지르는 일들이 많았고, 술도 많이 마시게 되었다. 돈도 버는 대로 써버렸다. 1991년에는 술집에서 싸움이 나 칼부림까지 했다. ‘심홍섭이는 안 되는가 보다!’ 하고 살 소망을 잃었다. 그때 학생 시절에 교회에서 들었던, 죽으면 지옥 간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 세상에서 보통 사람들이 누리는 삶도 누리지 못하고 살다가 죽는 게 억울했다.
그동안 죄를 많이 지었기에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내가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다. 교회에 다시 나가야겠다고 결정했다. ‘1991년 12월 31일 이전의 삶은 없다. 내 인생은 끝났고, 1992년 1월 1일부터 새 삶을 시작한다’고 마음먹었다. 욕심부리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부모님 속 썩이지 않고 선하게 살고자 했다.

그렇게 성경 이야기를 듣기는 처음이었다
1992년 1월, 당시 창원기계공고에 다니던 다섯째가 집에 와서 어머니를 전도했다. 교회는 내가 더 오래 다녔는데, 성경에 대해서 동생이 나보다 더 많이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동생이 다니는 교회는 다른 것 같아서 어느 교회냐고 물으니 기쁜소식선교회라고 했다. 당시 합천에는 기쁜소식선교회 산하의 교회가 없었고 압곡동에 있었다.
거창을 오가며 압곡동을 지날 때 그 교회를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서 동생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그날 압곡동교회에서 복음을 처음으로 들었다. 전도사님이 성경 말씀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그렇게 성경 이야기를 듣기는 처음이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아담의 후손인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인 것을 알았고, 레위기에서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죄제사를 드리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야 했는지 알았다. 내 죄를 예수님이 모두 담당하시고 죄 값을 지불하신 이야기를 들을 때 내 죄가 사라졌다. 내 마음이 하늘을 향해 열렸다.

구원받은 것은 감사하지만 인생을 멋지게 살고 싶었다
구원받고 합천에서 2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압곡동으로 교회를 다녔다. 신앙생활을 하려고 자동차 정비 일을 그만두고 전봇대를 싣고 다니는 운전기사 일을 했지만, 그래도 주일에만 교회에 갈 수 있었다. 1993년에 합천에 교회가 세워지면서는 모임에 자주 갈 수 있었지만, 내 마음에는 세상 욕망이 많았다. 중심의 방황은 끝났지만 물질적인 욕심은 버릴 수 없었다.
그 후, 우연한 기회에 진주로 가게 되어 1994년부터는 기쁜소식진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그리고 1995년에 결혼했다. 이후 두 아이가 태어나면서 당시에 받았던 월급 100만 원으로는 삶에 여유를 갖기 어려웠다. 돈을 벌고 싶었다. 복음은 좋고 구원받은 것은 감사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내 인생을 멋지게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배운 것은 없고, 다른 사람 밑에 들어가긴 싫고, 밑천도 없어서 고물장사를 시작했다. 1998년 IMF사태 즈음에 시작했는데, 내 손에는 돈이 있지만 집에 가져다 줄 돈은 없었다. 손에 있는 돈은 다음날 고물을 사야 했기 때문이다. 일은 많이 했지만 돈은 벌리지 않고, 힘들었다. 힘든 걸 잊기 위해 옛날 습관을 따라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장사를 하려면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해야 하기에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며 점점 더 술을 마셨다.
교회에서는 삶의 어려움이나 내 상태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교회에 가지 않았다. 방세가 밀리고 아이가 먹을 우유가 떨어져도, 나는 모르고 내 생각에 취해서 살았다.

종일 술만 마셨다
아이들 밥은 굶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합천으로 이사했다. 고향에서 아픈 아버지 대신 농사도 짓고, 전기회사에도 다시 다녔다. 교회는 여전히 가지 않았다. 그때 딸이 다섯 살, 아들이 세 살이었는데, 어느 날 가족이 모두 식중독에 걸려 아들을 잃고 말았다.
다시 교회에 나가기도 했다. 몸은 교회 안에 있었지만, 내 필요를 따라 간 것이었기에 마음을 꺾지는 않았다. 여전히 술을 마셨다. 설교 말씀을 달게 듣고, 술을 끊어야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밖에 나가면 쉽게 술과 세상에 빠졌다. 전도집회가 있을 때면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가 집회를 마치면 며칠씩 계속 마셨다. 자연히 구원받은 다른 형제들과 비교가 되었다. 나보다 나중에 구원받은 형제들도 신실하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구원받은 사람이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뿐이었다.
몇십 년을 합천에서 살다 보니 사람들이 대부분 선배요, 친구요, 후배였다. 구원받지 않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지만 계속해서 술을 마시다 보니 자포자기하고 말았다. ‘나는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게 하나님 뜻인가 보다. 그래도 주일에 교회는 가야지…’ 하고 살았다. 교회에서 자매님들이 술 좀 먹지 말라고, 사람 좀 되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가책을 받아 각오하고 결심하지만 소용없었다. 금방 다시 술에 빠지고 말았다.
은혜를 입어서 2004년부터 군청 소속으로 도로를 관리하는 일을 했는데, 2011년에 그만두고 열 사람 정도가 모여서 새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무산되어 이도 저도 아닌 형편에 빠졌다. 직장에 가지 않으니 집에서 종일 술만 마셨다. 술을 많이 마시다 보니 실수도 많고, 몸도 안 좋아졌다. 처음에는 술을 마실 때 안주도 챙겨 먹었지만 어느 때부터는 그냥 술만 마셨다. 간이 안 좋아지면 병원에 입원하고, 회복한 후 다시 술에 빠져서 살았다.
병원에 여러 번 입원했고, 창녕 부곡에 있는 국립정신병원에도 두 번을 입원해 있었다. 그렇게 지내다 나오면 또 술을 마시며 살았다. 술에 취해서 시내를 돌아다니고, 사람들과 싸워 파출소에 가고….

“심 형제는 이미 온전해졌어.”
2013년 겨울, 죽어야겠다고 생각하는 등 혼돈 속에서 지냈다. 12월 17일 화요일에는 그라시아스 합창단의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이 진주에서 있었다. 공연 하루 전인 월요일, 아내가 그동안은 술을 먹지 못하게 막다가 ‘이왕 먹는 거 실컷 먹으라’고 1.8리터 소주 네 병을 사왔다. 다섯 병을 사려다가 무거워서 네 병만 사온 것이었다. 나는 그 가운데 세 병을 화요일까지 마셨다.
그날 밤, 박옥수 목사님이 진주 칸타타 공연이 끝난 후 합천 우리 교회에 오셨다. 그때 아내가 목사님께 하소연했던 모양이다. “남편이 구원받고 20년이 되었는데 술 때문에 죽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리니, 목사님이 다음날 새벽에 나를 데리고 오라고 하셨다.
12월 18일 새벽, 한 형제 부부가 나를 데리러 승합차를 가지고 왔다. 일어났지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보름 이상 매일 소주를 7~8병씩 마셨으니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술은 취했지만 선교회의 어른인 목사님 얼굴이라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남은 소주를 밥그릇에 부어 마시니 몸이 조금 괜찮아졌다. 세수만 하고 교회로 갔다.
목사님은 새벽기도회 시간에 말씀을 전하신 후 나를 부르셨다. 목사님은 나에게 구원은 정확히 받았냐고 물으셨다. “예, 죄 사함의 복음은 정확하게 믿습니다.” 목사님은 다시 그동안 왜 술을 먹었는지 이야기해 보라고 하셨다. 지나온 날들을 죽 말씀드렸다.
“저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복음도 잘 전하지 못하고, 영적인 것도 없고, 변화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조금 힘들면 술을 마시게 됩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심 형제, 히브리서 10장에서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고 했어. 예수님이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를 영원히 온전케 해놓으셨어. 심 형제는 온전해. 심 형제, 믿음은 다른 게 아니야. 예를 들면, 술을 한 잔 마시고 잔을 탁자에 놔. 그리고 ‘내 몸은 술을 마셨지만 마음으로는 나는 술을 끊은 사람이야’ 해. 이게 믿음이야. 심 형제는 이미 온전해졌어. 자신을 믿지 마. 갈라디아서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어. 심 형제는 이미 끝났어.”
목사님이 나에게 들려주신 이야기는 내가 구원받을 때 들었던 복음과 같은 것이었다. ‘아, 그렇구나! 내가 술을 마시지만 나는 이미 술을 끊은 사람이구나!’ 나는 악을 행하지만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이루신 일로 인해 의로워졌다. 나는 내 행위와 상관없이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고, 예수님 안에서 의인이 되었다. 주님이 이루신 일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후, 이제는 내가 무얼 해서 나를 바꾸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신앙생활은 구원받은 것과 똑같이 예수님이 이루신 일을 믿는 것이었다. 내가 여태까지 속았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나는 내 행동을 고치려고 했지, 성경 말씀을 믿으려고 한 적은 없었다.
목사님을 뵙고 집으로 돌아와 속이 부대껴서 남은 소주를 마셨다. 하지만 “너는 온전케 되었어” 하는 말씀은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술만 마시고 산 내가 선교학교에?
박옥수 목사님은 내가 온전케 되었다는 말씀만 전해 주신 것이 아니었다. 내 나이를 묻기에 마흔 아홉이라고 대답하자, “심 형제, 10년 복음 전하면 되겠네. 강남교회에 와서 내 밑에서 선교학생들하고 함께 훈련 좀 받아” 하셨다. 나는 목사님 밑에서 지내며 술도 끊고 말씀도 들으면서 은혜를 입으라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가, 선교학교(마하나임신학교)에 들어오라는 말씀에 당황했다. 20년 동안 술을 마시고, 복음을 위하기는커녕 교회를 대적하고 합천 교회의 목회자들 속만 썩인 내가? 입에서 바로 “나 같은 사람이 강남교회에 가면 교회 버립니다!” 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심 형제는 왜 자신을 믿어? 여기 있는 사람, 다 인간 안 돼. 그래서 예수님이 필요해. 아내하고 의논해서 선교학교에 와. 언제쯤 올 건가?”
보름 동안 술만 마셔 몸이 엉망이어서, 며칠쯤 몸을 추스르고 12월 23일 월요일에 올라가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날 이후 나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자매가 해주는 죽을 먹으며 몸을 추슬렀다. 술에 찌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남은 짧은 삶을 복음을 위해 살게 해주시려고 예수님이 나를 찾아오셨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제는 새로운 심홍섭이 산다
나는 술만 마시고 배운 것도 없는 무식한 사람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인데, 나에게는 몸뚱이 하나밖에 없다. 선교학교에 온 후, 내가 선교학생이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어디서 왔어요?” 하고 물으면 “합천에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고, “어떻게 왔어요?” 하고 물으면 “박 목사님이 오라고 하셔서 왔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선교학교에 입학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이후로도 나는 학력이나 신실함이 다른 선교학생들과 비교가 되었고, 수업 시간에 무얼 받아 적어야 하는지 잘 모르고 발표도 못 하는 나를 보면서 마음이 눌렸다. 나는 너무 못나서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2013년 12월 18일에 “심 형제는 이미 끝났어. 심 형제는 이미 온전케 되었어. 자신을 믿지 마”라는 말이 내 마음에 들어와서 나는 이미 거룩해졌고 온전해졌다.
아직은 교회를 볼 만한 눈이 없고, 말씀을 들을 귀도, 깨달을 지혜도 없다. 하지만 요한복음 15장 말씀대로 포도원의 농부이신 하나님이 교회 안에서 나를 붙들어 주실 것이다. 나는 성경 말씀보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데 길들여 있기에 하나님을 거스르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당신을 섬길 수 있고 예수님을 의지해서 살 수 있게 이미 만들어 놓으셨다.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혀 이전의 심홍섭은 이미 끝났고, 이제는 새로운 심홍섭이 사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 말씀을 잊고 옛 사람에게 속아 살 때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자주 나를 붙들어 주심이 감사하다. 나는 누구보다 연약해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거짓인 내 생각에 쉽게 끌려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언제나 말씀이 흐르는 선교학교에 나를 두셨다는 마음이 든다. 이 은혜가 진실로 크고 감사하다. 술과 지독한 절망 속에서 나를 건지시고 나에게 새 날을 열어 주신 하나님께서 앞으로 내가 갈 길도 인도하실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내 등뒤에 있는 이 무거운 것을 내려줄 사람 없을까?’
내가 열 살 때, 스무 살이었던 오빠의 죽음을 보았다. 오빠를 참 좋아했기에 ‘죽으면 사람이 안 오는구나!’ 하고 마음에 선이 깊게 파였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후로 엄마가 가정을 힘들게 꾸려 나가셨다. 어린 나이에 인생에 회의가 오고 ‘사는 게 뭘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로는 몸이 많이 아팠다. 1년 휴학하고 다시 복학하려니까 친구들이 다 윗 학년이 되어 학교를 그만두고 방송통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자주 아프다 보니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쪽으로 마음이 갔다.
내가 스물 네 살이던 1991년, 직장생활을 하다가 몸이 아파서 3개월째 휴직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하루는 목욕탕에 목욕하러 갔다가 샤워기를 트는 순간 쓰러졌는데, 아주머니 세 분이 나를 도와주었다. 그분들은 기쁜소식진주교회에서 있었던 대전도집회를 도우러 온 선교학생들이었다. 고맙다고 인사하고 집으로 갔는데, 집 앞 가게에서 그분들을 다시 만났다. 나를 잡으면서 교회에 한번 가자고 강권했다. 고맙기도 해서 따라갔다.
 
설교 말씀을 들었지만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집회가 끝나고 세 분은 돌아가고, 어느 누구도 교회에 오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길이 없어 매일 교회에 나갔다. 목사님과 신앙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청년 자매들이 “구원받았니?”하고 묻는데, 그때 ‘구원’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한 달 동안 성경 말씀을 들었지만 도무지 알아듣지 못했다.
곧 여름 수양회가 있어서 사모님께 나도 수양회에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안 그래도 가자고 하고 싶었는데 주저하고 있던 사모님은 무척 기뻐하셨고, 수양회 복음반에 가서 말씀을 들었다. 나는 죄에 눌려 있었다. 그게 죄인지도 모르고, 너무 무거워서 ‘누구 내 등뒤에 있는 이 무거운 것을 내려줄 사람 없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복음반에서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히 10:17)는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이라는 분이 나의 죄를 기억 안 하시는구나’ 하고 마음이 평안해졌다.

버림받고 저주를 받은 것 같았던 삶의 연속
스물 여덟 살에 결혼했다. 결혼하고 곧 아이가 들어섰다. 마침 예배당을 옮기는 일이 있어 봉사하면서 무척 힘들었다. 그런데 하루는 남편이 술을 마시고 들어왔다. ‘구원받은 사람이…?’ 하고 깜짝 놀랐다. 그 후로는 술을 마시는 횟수가 점점 늘어갔다. 나는 왜 그러는지 몰랐다. 남편은 직장생활을 진득하게 하지 못하고 자꾸 일터를 옮겼다.
이후 고물장사를 하면서는 돈을 가져다주지 않을 때가 많았다. 둘째 아이 우유가 떨어져서 못 먹일 때도 있었다. 그런데도 남편은 집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을 마치고 오면 집 앞에 있는 슈퍼에서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떤 날은 들어와서 마당에 눕기도 했다. 왜 그렇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화로 풀리지 않아 굉장히 어려웠다.
하루는 아이들에게 먹일 게 없어서 율무를 삶아 된장국에 말아 주었는데, 어른도 먹기 힘든 것을 아이들이 잘 먹었다. 마음이 무척 아팠다. 남편이 결혼하자마자 고향으로 가자고 했었기에, ‘시댁에 가면 먹는 것, 방세 걱정은 안 하겠다’ 싶어 합천 시댁으로 이사를 갔다. 마음이 지쳐서인지, 흙내음과 자연의 모든 것들이 참 좋았다. 

 
이제 힘든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더 고통스런 일을 만났다. 둘째 아이를 잃은 것이다. 남편은 매일 술만 마시고…. 밥을 먹으려고 상에 앉으면 한쪽에 앉아 있어야 할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아이가 보고플 때면 가슴이 저리도록 아팠다. ‘이게 구원받은 사람의 삶인가…?’ 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이 닫혔다. 저주를 함지박으로 붓는 것 같았다. 남편은 술을 먹는 횟수도, 정도도 점점 심해졌다. 세상 사람도 그렇게 살지 않는데…. 알코올 중독으로 가정이 엉망이 되어 딸은 중학생이 되면서 빗나갔다. 조용했던 아이가 커가면서 그동안 눌렸던 것이 폭발하는데 감당할 수 없었다. 남편이 술을 마시는 것도 힘들지만, 자식이 잘못될까 걱정하는 것은 더 힘들었다. 아이가 정말 빗나갈까봐 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스트레스 탓인지 자궁에 큰 혹이 생겨 자궁을 다 들어내 여자로서의 삶도 끝났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고, 저주하신 것 같았다. 어디에도 소망이 없었다. 교회에는 그냥 가서 앉아 있었다. 내가 직장에 다니면서 사는 건 어느 정도 해결되었기에 남편이 좋아질 수만 있다면 어떻게라도 해보고 싶었다. 예배당 공사하는 곳이 있으면 가게 하고, 마지막으로 정신병원에도 있게 해보았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저는 목사님을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박옥수 목사님 앞에 나가야겠다. 목사님을 통해서 많은 학생들이 바뀌고 마약 중독자도 바뀌었는데, 우리 남편도 바뀌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 하지만 목사님이 해외를 비롯해 가실 곳이 워낙 많아서 목사님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작년 겨울, 진주에서 있었던 그라시아스 합창단의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에 오신 박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드디어 예배당에서 목사님을 뵈었다. 형제 자매들이 목사님과 함께 둘러앉은 자리에서 “목사님을 꼭 한번 뵙는 게 마음의 소원이었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목사님이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들리지 않고, “목사님, 너무 힘들어서 미칠 것 같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목사님이 내 손을 꼭 잡아 주셨다. 아버지가 딸을 대하시는 것 같은,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졌다. 뭔가 따스함이 전해졌다. 가슴이 뭉클했다. 남편을 교제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다음날, 목사님은 남편에게 선교학교에 오라고 하셨다. 그런 이야기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고, 남편이 술만 끊을 수 있다면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는데…. 목사님은 우리 부부와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이 믿어지자
선교학교에 와서 수업시간에 말씀을 배우면서 풀리지 않던 가슴의 응어리들이 다 풀렸다. 나는 너무나 좋지 않은 형편들을 만나면서 ‘하나님이 진짜 살아 계실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목사님이 강의하신 창세기 1장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이 바뀌었다.
“하나님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 있는 이 땅을 절대로 그냥 지나가시지 않습니다….” 목사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땅의 모습과 똑같은 내 마음에 하나님이 오셔서 일하고 싶어하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자 ‘아! 천지만물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구나!’ 하고 하나님의 존재하심이 믿어졌다. 그동안 하나님의 역사들을 눈으로 보면서도 내 형편에 갇혀서 말씀을 믿지 못했는데…. 하나님이 살아 계심이 믿어지자 모든 것이 풀리기 시작했다.
창세기 3장을 공부하면서는 내가 왜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았는지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나를 돕고 싶으셨는데, 내가 하나님을 못 믿었구나! 나에게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에 그 고통과 괴로움을 겪었구나! 가시와 엉겅퀴 속에서 많은 시간을 힘들게 살았구나….’ 그분의 존재를 믿지 않았기에 하나님을 찾을 줄도 몰랐다. 내가 고통스러웠던 이유를 알게 되니 마음이 참으로 평안해졌다. 남편이 미친 사람처럼 살았지만, 나 또한 미친 마음으로 살았던 것이다. 남편에게도 미안하고, 딸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감사하다. 남은 것은 복음밖에 없다. 복음을 위해서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사는 게 의미가 없기에 복음밖에 없다는 마음이 든다.

나의 왕이요,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은 나를 위하고 싶으셔서 내 마음에 주인으로 오시려고 많은 일을 하셨지만, 그동안 내 마음의 왕국에서 내가 주인으로 살았다. 이제 그 자리를 하나님께 내드렸다. 이제는 주님의 발치에서 남편을 위해서, 딸을 위해서, 구원받지 않은 가족들을 위해서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주님이 다스리시니까 평안하다. 나의 왕이요,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내가 구할 때 모든 것을 이끌어 가시겠다는 마음이 든다.
한 맺힌 인생을 살다가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 삶을 끝낼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박 목사님을 보내 주셔서 당신을 알지 못해  불신 속에서 살던 내 마음을 풀어 주셨다. 평안을 주시고, 소망도 심어 주셨다. 이제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이 교회에서, 어디에서든 하나님이 원하시는 위치에서 교회의 한 부분이 되어 살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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