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뿐인 불쌍한 모습, 구원의 손길이 절실했다
육체뿐인 불쌍한 모습, 구원의 손길이 절실했다
  • 박영찬 (기쁜소식남원교회 목사)
  • 승인 2014.06.04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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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간증 | 시각의 변화, 행복의 시작 (2회)

기쁜소식남원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는 박영찬 목사.
그는 지난날 큰 슬픔, 깊은 좌절,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었다.
절망의 늪에서 버둥거리던 그가 지금 소망의 대지(大地)에서 행복하게 살기까지,
그의 인생 이야기를 5회에 걸쳐 들어보자.

 

은혜의 세계에서 살면서도 나 중심적인 마음으로 살았기에…
해양대학을 졸업하고 선박에서 생활하던 중 1990년에 구원받은 나는 1993년에 교회에 연결되었고, 거듭난 성도들의 모이는 교회에서 전해 주는 말씀을 듣고 싶어서 곧바로 선원 생활을 정리했다.
교회 안에서 보내는 삶은 은혜의 연속이었다. 1993년 5월에는 구원받은 자매와 결혼하여 딸(박설하, 현재 굿뉴스코 13기 단원으로 뉴욕에서 활동 중)과 아들(박지수, 현재 청주 링컨하우스스쿨 3학년)을 얻었고, 1997년 9월에는 은혜로 선교학교(현 마하나임신학교)에 입학하여 하나님이 복음 전도자의 길을 가게 하셨다.
이후 하양, 장흥, 밀양에서 목회하는 동안 하나님은 내 모습과 상관없이 수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은 내 실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교회 안에서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였다. 그러나 나는 은혜의 세계에서 살면서도 나 중심적인 시각과 마음으로 살았기에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못했다. 나 중심적인 삶은 나를 세우고 나를 욕망으로 끌고 가서 결국은 망하게 하지만, 그 길을 가는 동안 나는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허전함과 우울한 생각들이 찾아와서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2009년, 아버지와 아내의 죽음을 통해서 미련한 나는 처음으로 두 사람의 삶과 내 삶을 비교해 보았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사신 분들의 삶이 보였고, 나밖에 모르고 나 중심적으로 살아온 형편없는 내 삶이 보였다. 나 중심적인 시각으로 사는 동안 결국 나는 다 망해야 했다.
15년을 동고동락한 아내를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후, 딸은 고등학생이 되어 마산 링컨하우스스쿨에 입학시키고, 중학생이 된 아들과 둘이 지냈다. 예배에도 참석하고 몸은 교회 안에서 보냈지만, 저녁 모임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말할 수 없는 공허함이 밀려왔다. 잠들어 있는 아들을 바라보고 거실 소파에 몸을 맡기면 알 수 없는 허전함과 우울한 생각들이 어디서부터인지 찾아와서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그냥 잠들 수 없었다.
목회자로 교회에서 지내며 복음을 전하면서 살았던 지난 날들을 떠올려 보았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다시 복음 전도자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
나는 목회하는 동안 복음 전도자의 길이 힘들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하나님의 종인, 나를 인도하신 박옥수 목사님은 신앙이든 목회든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기에 쉽다고 하시는데, 나는 신앙도 목회도 힘들고 어려웠다. 나 중심적인 마음과 시각으로 나를 위해 살았기 때문에 모든 일을 내가 이루어야 했고, 하는 일마다 어려워해야 했다. 당시 나는 내 육신이 잘 되고 편하게 쉬는 게 은혜인 줄 알았다.
결국 한계를 느껴 목회를 그만두면서도 나는 내 생각을 믿고 평신도로 지내면서 복음 전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복음과는 상관없이 육신의 삶에 빠져 지내는 나를 보았다. 예배도, 교회의 각종 모임도 습관을 좇아 형식적으로 참석할 뿐이었다. 나는 아무런 영적 감각이 없는 종교인처럼 변해 갔다. 세상과 죄악의 유혹은 나를 가만두지 않았고, 내 육체는 그 유혹을 이길 아무런 힘이 없었다. 주말이면 교회에서 형제들과 같이 운동도 하고 신앙교제도 나누었지만 마음엔 항상 공허함이 남았다.

 
스스로 불행한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탕자처럼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둘째 아들. 그는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의 은혜 속에서 살고 있었지만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했다. 그랬기에 그는 아버지의 지혜나 능력이나 덕을 볼 수 없었다. 자기중심적인 사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를 무시하게 하고, 자기를 세우며 살게 했다. 그는 아버지의 분깃만 가지면 자신도 얼마든지 잘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버지의 시각으로 무엇을 볼 만한 눈이 없었던 둘째 아들은 결국 스스로 불행한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은 끝없이 추락했다. 아버지 집에서 듣고 배웠던 어떤 지식도, 이론도 그를 허랑방탕에서 지켜 주거나 잘못된 삶에서 돌이키게 해주지 못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7) 둘째 아들에게 찾아온 것은 고통과 죽음이었다. 마음에서 주님과 교회를 떠난 나에게 찾아온 것도 눈물과 고통뿐이었다.
둘째 아들이 살 수 있는 길은 아버지 집으로 돌이키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 집으로 돌이킬 지혜와 힘도 그 스스로에게는 없었다. 주려 죽어 가는 가련한 자신의 모습이 보이고, 품꾼에게도 풍족하게 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이 보일 때 비로소 돌이킬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목회하는 동안 늘 대접을 받는 위치에서 내가 잘난 줄 알고 성도들을 가르치면서 살았다. 은혜 안에서 복음 전도자로 세움을 입었지만, 나는 나 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 나를 높이고 살았던 것이다. 성경의 지식은 쌓아 갔지만 주님의 마음의 세계는 전혀 배우질 못했다. 그렇게 살다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니, 실제 내 모습은 교회 안에서나 세상에서나 가장 못나고 부족한 인생이었다. 스스로 잘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목회를 그만두더라도 복음을 전하며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 줄로 생각했지만 그것은 거짓된 내 생각일 뿐이었다. 나는 정말 복음과 상관없이 살았다. 숱하게 들었던 말씀들은 그 내용을 지식으로 알 뿐이었다. 말씀을 믿거나 나를 부인하거나 복음을 위해 사는 실제적인 삶은 없었다. 철저히 나를 위해서 살아갈 뿐이었다. 주말에는 세상만사 잊고 싶어서 등산만 다녔다.

나에게는 구원의 손길이 절실했다
“네가 어찌 말하기를 ‘나는 더럽히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을 좇지 아니하였다’ 하겠느냐?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 너는 발이 빠른 젊은 암약대가 그 길에 어지러이 달림 같았으며”(렘 2:23)
아버지의 은혜 속에서 살아왔던 나에게서 은혜로 주어진 아버지의 것들을 제하고 나니, 남은 것이라고는 형편없이 무능하고 악밖에 없는 육신뿐이었다. 복음 전도자의 직분을 잃고 목회자의 옷을 벗고 나니 내 육신 깊은 골짜기에 숨겨진 악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하나님의 은혜를 제하고 나니 나는 육체밖에 없는 불쌍한 모습이었다. 죄악의 도성으로 발 빠르게 달려가는 암약대처럼, 나는 일상의 노예가 되어 악에 끌려다녔다. 은혜 아니면 회복될 수 없는 나였다. 목회나 복음 전도는 둘째치고 신앙생활도 하지 못하는 나에게는 구원의 손길이 절실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에스더 성경을 통해서 내가 와스디처럼 얼마나 높은 마음으로 살아왔는지를 보여 주셨다. 고마워하거나 감사하는 마음 없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온 나 자신이 후회가 되었다. 처음으로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고, 아전인수(我田引水) 식으로 살아온 나 자신이 보이면서 고통스러웠다. 하나님은 무딘 내 마음을 조금씩 나 중심적인 시각에서 다른 사람 중심의 시각으로, 그리고 하나님 중심의 시각으로 옮기셨다. 이론과 지식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마음의 세계를, 하나님은 내 삶을 망하게 하여 하나하나 마음으로 발견하게 이끄셨다.

‘어려움이 딸아이를 성숙하게 했구나!’
엄마가 없는 삶은 아이들에게도 마음을 성숙하게 하는 은혜를 입혔다. 아이들은 엄마가 없는 가운데에서도 교회 안에서 은혜를 입으며 신실하게 자라 주었다. 그래도 중학생 아들과 둘이 지내는 삶은 만만치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 옷은 빨면 빨수록 뻣뻣해졌고, 수건이나 속옷은 세탁기로 빠는데도 점점 시커매져 갔다. 나는 아들에게 양말은 3~4일씩 신고, 속옷은 5~6일씩 입고 벗으라고 했다. 아들은 내 말을 잘 따라 주었다. 빨래는 거실 바닥에 널어서 말렸고, 다 마르면 돌돌 말아서 옷장 안에 넣은 후 입을 때 하나씩 털어서 입었다. 다림질해야 할 옷은, 세탁할 때 탈수하지 않고 헹굼 상태에서 꺼내 물기가 있는 채로 걸어서 말리면 다림질하지 않아도 입을 만했다.
문제는 음식을 해먹는 일이었다. 그것은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주로 인스턴트 식품을 사먹었다. 가끔 김치찌개나 국을 끓이면 맛이 나지 않아서 설탕을 넣어 보기도 했지만, 맛을 내는 게 쉽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옷장 안에 있는 옷에나 이불에 곰팡이가 피고, 수건에서는 금방 땀 냄새가 풍겨났다.
실제 삶 속에서 사소한 일조차 감당할 수 없는 내 모습을 하나님은 드러내셨다. 머리로는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실제로 덤벼들어 보면 은혜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나를 누구 앞에서도 잘난 척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셨다.
마산 링컨하우스스쿨에 다니던 딸은 한 번씩 집에 오면 아빠와 동생을 위하여 빨래며 집안 청소를 했고, 음식들을 만들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엄마 노릇을 하는 딸을 보면서 내가 딸을 그렇게 키웠다는 마음은 전혀 들지 않고, ‘어려움이 딸아이를 성숙하게 했구나! 교회가 딸아이의 마음을 잡아주었구나!’ 하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돈이 생기면 자신을 위해 쓰기보다 가족을 위하는 마음이 나와 아이들에게 생겼다. 우리로서는 가질 수 없는 마음들을 하나님은 어려움을 통해서 만들어 주셨다. 둘째 아들의 마음에 평생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에게 속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마음의 세계가 죄인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만들어졌듯, 하나님은 나와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일하셨다.

 
동병상련의 처지에서 마음으로 친구가 된 허인수 목사
2010년 광주에서 지내는 동안,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던 허인수 목사가 대장암 수술을 받고 요양차 광주에 내려왔다. 전에 함께 목회했던 친구 같은 동역자였던지라 마음이 갔다. 대장암 수술을 받은 후 후유증으로 아파하는 모습이 측은해 보였다.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던 나는 퇴근 후 허 목사와 함께 본죽식당에 가서 죽을 사먹으며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허 목사에게 “세상에 귀하고 소중한 것이 많겠지만 아내보다 귀한 것은 없다”고 하면서, “만만한 게 아내라고 강대상에서 아내를 육신적이라고 지적만 하지 말고 잘해 주라”고 했다. “하나님이 맺어준 귀한 짝이 둘도 없는 아내이니 마음으로 같이 밥도 사먹고 맛있는 커피도 같이 마시면서 짧은 인생 복음 안에서 마음을 나누며 행복하게 살라”고 했다. 나는 목회자가 아니었기에 허 목사에게 내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할 수 있었다. 우린 마음으로 무척 가까워졌고, 동병상련의 처지에서 마음으로 친구가 되었다.
한번은 허인수 목사 부부와 함께 극장에서 “그대를 사랑합니다”란 영화를 보았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년의 부부가 자식들이 제 갈 길로 다 떠난 후 서로를 배려하며 마음으로 위해 주고 사랑하며 사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답게 묘사된 영화였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하늘나라로 먼저 간 아내에게 그렇게 못 해준 것이 못내 아쉬웠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는 속담이 생각났다. 허 목사 부부는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 여러 어려운 형편 속에서 부부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마음이 가까워져 가는 두 사람을 보면서 나도 감사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성경 말씀이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눅 16:9) 자기중심적인 시각과 마음으로는 불의의 재물을 자신을 위해 쓸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살던 나를 하나님은 내 삶을 망하게 하여 마음을 바꾸어 주셨다. 불의의 재물로 사귄 친구 허인수 목사는 훗날 나를 복된 처소로 영접해 주었다.

 
어려움은 내 마음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광주에서 지내는 동안 겪었던 어려움은 내 마음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하나님은 ‘믿음의 3요소’를 내 마음에 만들어 주셨는데, 그것은 인내(기다림)와 자기 부인, 그리고 원시안(멀리 보는 눈)이었다. 내 영혼을 그렇게 가르치시는 하나님 앞에 감사할 뿐이었다.
40대 초반이었던 나는, 혹시 내가 교회에서 은혜를 입어 재혼하게 된다면 아내에게 정말 잘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내를 배려하고, 아내의 말을 경청하리라 다짐하곤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나는 여전히 나를 기대하고 있었고, 내 생각을 믿었던 것이다.
내 마음은 주님의 마음에 전혀 미치지 못했지만 주님은 내 모습과 상관없이 은혜를 베푸셨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하루는 서울에서 목회하시던 가깝게 지내는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울에 있는 한 자매님과 선을 보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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