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다 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자네를 도우셔”
“전, 다 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자네를 도우셔”
  • 박영찬 (기쁜소식남원교회 목사)
  • 승인 2014.07.04 16: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목회자 간증 | 시각의 변화, 행복의 시작 (3회)

 

하나님은 어려움을 통해 새 마음을 만들어 주셨다
2009년에 아내와 사별한 후 혼자 살던 나는 2011년 추석 무렵 서울에 사는 어느 자매님과 선을 보았다.
광주에서 어렵게 살았던 삶을 통해 하나님은 내 마음에 전에 없었던 새 마음을 만들어 주셨다. 먼저는, 어떤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형편에 들어가 보지 않고서는 결코 그 사람을 판단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는 마음이었다. 또, 하나님은 내가 어느 누구 앞에서도 나를 자랑할 수 없는 인간임을 알게 하셨다. 그동안 이론과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마음의 세계들을 하나님은 삶의 어려움을 통해서 실제적으로 하나하나 깨우쳐 주셨다.
하나님은 믿음의 3요소를 내 영혼에 가르쳐 주셨는데, 첫째는 자기 부인(否認)으로, 육신의 잘못되고 부정적인 모든 생각들을 버리는 것이었다. 둘째는 원시안(遠視眼)으로, 멀리 미래와 장래를 보는 시각을 갖는 것이었다. 셋째는 인내로, 어떤 일 앞에서든지 기다리는 마음을 갖는 것이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 8:15)
하나님은 무디고 질긴 내 마음의 밭에 당신의 말씀의 씨앗들을 심기 위하여 내 마음을 기경해 주셨다. 사탄의 성품을 지니고 출생하여 세상에 길들여지고 다져진 내 육신의 마음이 그냥 머리로 생각해서 버려질 수 없는 것이었다.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나를 교회 안으로 인도하셨고, 실제적인 삶을 통해 마음의 세계를 하나하나 만들어 가셨다.

 
재혼(再婚)
선을 보기 얼마 전, ‘이제는 정말 누구를 만나든지 잘해 주어야겠다, 경청하고 배려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것이 나를 믿는 또 다른 마음인 줄을 몰랐다.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나에게 달린 건 자식 둘, 선을 본 자매님에게도 자식 둘이 있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하나 되기로 약속하고 교회의 인도를 받아 재혼했다.
그동안 광주에서 살면서 부족하나마 어느 정도 기반을 닦아 놓았기에 나는 살림을 광주에서 하고 싶었지만 자매는 서울에서 살고 싶어했다. 광주에서 혼자 살고 계시는 어머니도 서운해 하시고 교회에서도 서울에서 사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나는 조강지처와 아프게 사별한 터라 재혼한 자매가 원하는 대로 맞춰 주고 싶었다.
그래서 살림을 서울로 옮겼다. 이사하던 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를 많이 의지하셨던 어머니는 무척이나 섭섭해 하셨다. 하지만 자식 잘되라는 마음으로 당신의 마음을 접으시고 “서울 가서 잘살아라” 하며 많은 걸 챙겨 주셨다. 자동차 백미러에 비쳐진 어머니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식은 평생 부모의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자주 찾아뵙겠노라는 나의 말은, 달리는 자동차의 배기가스처럼 대기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목사였고, 45세인 어정쩡한 사람을 세상은 받아주지 않았다
서울에서의 삶은 만만치 않았다. 광주에서 다니던 직장을 정리하고 서울에 올라왔는데, 막상 와서 보니 45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직장 잡기란 하늘에 별 따기 같았다. 나를 비롯해 아이들 4명에 아내까지 여섯 식구의 가장이 된 나는 위기감을 느꼈다. 어떻게든 서울에서 살길을 찾아야 했다.
낮에는 직장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밤에는 취업을 위한 자격증 공부에 매달렸다. 물가가 광주의 두세 배는 되었기에 가지고 간 돈은 금방 바닥을 드러냈고, 나는 링컨하우스스쿨에 다니던 두 아이의 학비와 새로 자녀가 된 두 아이의 교육비, 공과금, 생활비 등등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최대한 마음을 낮추어 직장을 구해야만 했다.
과거 직업이 목사인 사람, 나이가 45세인 어정쩡한 사람을 세상은 받아주지 않았다. 누가복음 말씀이 생각났다.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눅 16:3)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실상이 되어 내 삶에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파주에 있는 군부대의 군무원이 되었다. 오랜 가뭄 끝에 찾아온 단비처럼 직장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32평 아파트도 대출을 받아서 장만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서울에서의 삶에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렇게 군무원으로 생활하면서 아이들 뒷바라지하며 평범하게 교회의 한 형제로 살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이혼만은 막아보려고 빌고 또 빌었지만…
결혼하고 몇 달이 지난 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재혼한 자매가 낳은 두 아이는 8년 동안 아빠 없이 엄마와만 살아서, 측은한 면도 있지만 삶에 잘못된 부분도 있었다. 그래서 새아빠로서 타일렀지만 말만으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잘못된 부분도 있었지만, 부정적이고 율법적인 내 시각에 더 큰 문제가 있었다. 하나님 중심의 시각이 아닌 나 중심의 시각으로 보니, 내 생각과 딱 맞는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초달을 차마 못 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 13:24)
두어 차례 아이들을 혼내고 매로 다스렸다. 그런데 그 일이 문제가 되었다. 아이들이 그 일을 친할머니에게 이야기하고, 할머니는 아이들 엄마에게 따지고….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상했기에, 평소 자매에게 그럴 때 내 편에 서야 한다고 설명해 왔었다. 그런데 일이 벌어지자 자매도 나에게 마음을 닫았다. “과거에 목사까지 한 사람이 아이들을 사랑으로 품어 줘야지, 어떻게 때릴 수 있냐?”고 했다.
그때부터 나와 자매의 관계에 문제가 찾아왔다. 나는 이혼만은 막아보려고 빌고 또 빌었지만, 자매에게도, 아이들의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에게도 전혀 통하지 않았다. 마음이 한없이 어렵기만 하고, 길이 없었다.

최선을 다했는데…
어떤 설득도 통하지 않아 결국 자매의 요구대로 이혼해야만 했다. 이혼 후,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홀로 계신 어머니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고, 교회 앞에서도 너무나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혼 후 자매는 아파트 소유권 이전을 계속 요구했다.
과거 조강지처를 병으로 갑자기 떠나보냈던 나는 아내에게 잘해 주었다는 마음은 하나도 없고 못 해준 것만 기억나서 너무 미안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는데 당연하게 여기고만 살았던 내가 너무 교만하고 거만했다고 여겨졌다. 그랬기에 재혼하게 되면 새 아내에게 정말 잘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배려하고 그 말을 경청하며 모든 것을 품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대로 재혼한 후 내 주장을 다 버리고 서울로 올라왔고, 여섯 식구의 생활을 위해 온 마음으로 직장을 구하고 집을 장만했다. 그런데도 아이들 혼낸 것을 빌미로 이혼을 강행하는 자매를 보면서, 마음에 온갖 악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탄은 이때다 하고 기회를 타서 내 속에 계속 옳음을 넣어서 나를 괴롭게 했다.

‘어쩌다가 내가 여기까지 왔나?’
이혼한 후 갈 곳이 없었다. 2013년 1월의 파주 날씨는 정말 추웠다. 내 발걸음은 힘없이 찜질방이나 여관방으로 향했는데, 그때 광주에서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지냈던 친구 허인수 목사가 생각났다. 전화를 했더니, 마침 기쁜소식파주교회로 이동한 지 한두 달 되었다며 교회로 오라고 했다. 오라는 데도 없고, 갈 곳도 없는 비참한 나에게, 친구를 주신 하나님이 기쁜소식파주교회로 나를 인도해 주셨다. 곧장 교회로 갔다. 친구는 아무 조건 없이 나를 푹 쉬게 해주었다. 예배당 뒤편에 있는 컨테이너 방에서 추운 겨울 3개월을 교회의 은혜로 보냈다.
파주에서 지내는 동안 ‘어쩌다가 내가 여기까지 왔나?’ 하는 생각에 하루하루가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하나님은 다시 한 번 나 자신을 기대하고 살려고 했던 나를 완전히 걷어내셨다. 그렇게까지 하신 하나님이 인정되면서도, 속에서 올라오는 육신의 생각은 이길 수 없었다. 미움, 분노, 죽음, 온갖 악한 생각들이 마음을 괴롭혔다.

“영찬아, 네가 가시나무야”
하루는 늦은 밤 잠에서 깨어 누워 있는 나를 보았다. 조용히 나 자신을 보다가 순간 깜짝 놀랐다. 너무나도 초라하고 형편없는 내가 보였다. 처음으로 나 중심의 시각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시각으로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처량하기 짝이 없는 나, 그러면서도 악으로 가득 찬 속 모습.
그때 하나님께서 마태복음 7장 말씀으로 나에게 말씀하셨다.
“영찬아, 네가 가시나무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 7:16)
이 말씀에 나오는 가시나무가 바로 나 자신인 것을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시나무였다. 가시나무로 태어나서 늙어 죽을 때까지 가시밖에 없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이 나이 먹도록 누가 내 곁에 와서 평안을 맛본 적이 있을까…? 누가 내 옆에 와서 쉬어본 적이 있을까…?’
지난 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아무도 내 곁에 와서 쉬어본 적이 없는, 악밖에 없는 나 자신이 보였다. 나 중심의 시각으로 늘 상대방을 향하여 원망의 시선을 보내던 나였는데, 처음으로 하나님 중심의 시각으로 가시나무인 나의 실체를 보았다. 사람에 대한 원망이 끝이 났다. 누구 때문이 아니었다. 거짓된 내 시각을 옳게 여기고 살아온 내 인생 길은 패망할 수밖에 없는 길이었음이 분명해졌다. 나 자신이 통째로 망했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어둠 속, 길고 긴 터널 속에 있는 나 자신이 보였다. 그곳엔 슬픔과 고통, 저주와 심판밖에 없었다. 누가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누가 내게 웃음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내가 보는 것을 따라, 내 생각을 따라 살아온 삶의 끝은 눈물뿐이었다. 각오와 결심으로, 내 옳은 소견을 따라 살아온 길의 끝은 나뿐 아니라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을 병들게 했다.
아무도 없는 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내가 너무나 처량하고 비참했다. 가시나무가 포도를 맺으려고 애쓰는 것이 가당치 않듯, 악밖에 없는 내가 선한 열매를 맺으려고 가증하게 살아온 삶의 결과였다.

“박 형제, 하나님은 자네 편이야”
1990년에 구원받아 1993년에 우리 교회를 만난 후,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나 자신의 실체를 처음으로 보았다. 내가 가시나무인 것을 발견한 것이 끝이 아니었다. 가시나무이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못된 나무이기에 찍혀서 불에 던져지는 것이 운명이었다. 나는 악한 가시나무일 뿐 아니라, 멸망의 불에 던져질 운명이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마 7:19) 구원자 외에는 나에게 길이 없었다.
며칠 후 늦은 밤, 박옥수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박 형제, 잘 지내는가? 날세.”
나는 통곡하듯 말했다.
“목사님, 전 다 망했습니다! 이혼해서 갈 곳도 없고, 괴로워 죽고 싶습니다!”
목사님은 흔들리지 않는 차분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박 형제, 하나님은 자네 편이야. 하나님은 자네를 도우셔. 강남으로 오게. 우리 강남에서 교제하세.”
전화를 끊은 후,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의 음성이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악하게 살았고, 그 결과로 이렇게 다 망하고 부끄러운 것밖에 없는데, 하나님은 내 편이시고 나를 도우신다고?’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박 목사님을 찾아뵙고 그동안 살아온 삶을 말씀드렸다. 목사님은 “박 형제, 신앙은 마음에 선을 긋는 거야. 자네가 한 일의 결과는 다 망했고, 예수님이 하신 일의 결과는 우리를 복되게 했어. 신앙은 마음에 선을 긋는 거야” 하고 말씀하셨다. 목사님은 내 마음에 선을 긋게 하셨다. 나를 믿고 살아온 삶의 끝을 보게 하셨다. 목사님과 교제를 나누고, 나는 마음으로 회개할 수 있었다.
주님은 죄에서의 구원도, 삶에서의 구원도 100% 구원자인 주님으로 말미암는다는 분명한 마음을 새겨 주시면서, 나 같은 자를 다시 마하나임 신학교로 이끌어 주셨다.

아이들과 함께 방에 모여서 밥을 먹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는 동안 하나님은 아이들에게도 역사하셨다. 엄마를 잃은 후 많이 방황하던 딸 설하는 마산 링컨하우스스쿨에, 말수가 적어지고 아빠가 없으면 불안해하던 아들 지수는 청주 링컨하우스스쿨에 들어간 후 마음에 안정을 찾고 힘을 얻었다. 아이들이 밝아지는 것을 볼 때마다 교회가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아빠의 재혼 소식을 듣고 아이들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 소식을 듣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아이들이 받은 상처는 깊어져만 갔다. 나는 정말 아버지의 자격이 없었다. 기쁜소식파주교회 예배당 뒤에 있는 컨테이너 방에서 생활하는 동안, 아이들은 명절이 되어도 아빠를 찾아올 수 없었다. 아이들이 와도 같이 누워 있을 방 한 칸이 없었다.
내가 고통하는 동안 아이들은 나를 위해 기도했다. 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여대에 들어가 기쁜소식성북교회에서 생활했는데, 계속해서 나에게 자신의 간증을 들려주고 복음을 향한 마음을 이야기했다. 내가 교회의 은혜로 마하나임신학교로 가던 날, 딸은 온 밤을 뜬눈으로 보내며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한다.
아들도 어려움들을 지나면서 마음의 세계가 깊어졌다. 아빠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세상을 기대하는 마음도 버리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마음이 자라 갔다. 명절에 다른 친구들은 다 집에 가는데, 자신은 아빠에게 갈 형편이 못 되어 혼자 기숙사에 있으면서도, 내가 걱정할까봐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아들이 공부에 마음을 쏟아 성적이 오른 것도 감사하지만, 주님을 의지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지도자가 되리라는 약속을 주신 것이 정말 감사하다. 아들도 나를 다시 이끄신 하나님을 보며 말할 수 없이 감사해 예배 시간에 가슴 떨며 간증했다고 한다.
나는 아이들을 위해서 해준 게 하나도 없었지만 하나님은 가난하고 형편없는 가운데에도 아이들을 사랑으로 붙들어 주셨다. 어려움 속에서 아이들에게 마음의 세계를 만들어 주시고 꿈을 주시는 하나님이 감사했다.

 
2013년 4월 중순, 나는 박옥수 목사님의 배려로 방배동에 있는 사택 건물의 한 방에 거하며 마하나임신학교를 다녔다. 하루는 아이들과 함께 방에 모여서 밥을 먹는데, 얼마나 감사한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