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가 나를 자유케 한다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한다
  • 구자형
  • 승인 2014.08.13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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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간증

나의 어린 시절에서 학생 시절까지

 
나는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면서, 인천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남동생과 함께 집을 떠나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집을 떠나는 게 너무 좋았다. 아버지는 세상 누구보다 부지런하시고 삶에 대한 인내와 끈기가 대단하셨다. 아버지는 뼈를 깎는 노력으로 가난했던 우리 집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셨고, 5남매를 다 대학까지 공부시키셨다. 당신이 그처럼 반듯하게 사셨기에 우리의 실수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고 야단을 치셨다. 나는 자연히 ‘오늘은 또 무얼 잘못해서 혼나지 않을까?’ 하고 늘 전전긍긍하며 살았다.
부모님은 내가 어릴 때부터 옷 장사를 하셨다. 지금도 일흔이 넘은 연세에 여주에서 옷가게를 하고 계신다. 어렸을 적에 부모님은 여주 인근에 서는 장마다 찾아다니며 장사를 하셨다. 아버지는 스스로 당신을 장돌뱅이라고 하셨다. 우리 5남매는 바쁜 엄마를 대신해 할머니가 키우셨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부모님은 벌써 장사를 나가셨고, 우리가 잠들기 전에 들어오시는 날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아침부터 할머니는 아이 우유 먹이랴, 손주들 씻기고 챙겨서 학교에 보내랴 정신이 없으셨다. 우리 집은 항상 전쟁터 같았다. 할머니도 너무 힘드셔서 짜증도 내고 신세한탄도 하셨는데, 장녀인 나는 그 모든 것을 보고 자랐다. 자연히 철이 빨리 들어서 천진난만하게 뛰놀기보다 마음에 아픔과 그늘이 많은 아이로 자랐다. 학교에서는 자존심 강하고 까칠해서 웬만한 친구들은 말도 붙이지 못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셨던 할머니의 영향으로 나도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고등학생 때는 음악회, 문학의 밤 등 여러 행사들을 맡아서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죄 문제가 늘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내가 하나님을 등진 인간의 근본적인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기독교는 죄라는 올가미로 인간을 가두고 죄를 인정하라고 압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나는 교회에 나가지 않기로 했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게 만들었던 남자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이 쉽게 되지 않았다. 동생 넷이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던 때라 부모님의 어깨가 굉장히 무거웠기에 마음에 늘 부담이 되었다. 항상 계산이 정확하시고 매사에 흐리멍덩한 꼴을 못 보시는 아버지는 말씀은 안 하셔도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 몹시 괴로웠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1년쯤 되었을 때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그냥 직장을 잡았다.
2년 정도 직장에 다니면서 같은 직장에 근무하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충청도 공주 사람으로 유머 있고 이해심 많은 자상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와 다른 남편이 좋았다.
남편을 만나기 전에 배가 아파 병원에 갔다가 왼쪽 난소에 큰 종양을 발견해 수술을 받기로 예약되어 있었다. 그런데 의사가 원인은 모르지만 오른쪽 난소도 건강하지 못해 아이를 낳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여 결혼을 포기했다. 하지만 남편은 병원에 찾아와 의사를 만나 나의 약혼자라고 말하고 내 병에 대해 다 듣고는, 나에게 “나는 아이를 싫어해서 아기 안 낳아도 좋으니 결혼하자”고 했다. 낮에는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이 병문안을 오기에 남편은 밤마다 병실에 찾아와서 간호하고 나를 지켜 주었다.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고, 삶에서 처음으로 따뜻하고 편안함을 느꼈다.

어느 날, 남편이 연락도 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편과 결혼하고 2년쯤 되었을 때, 바쁜 남편을 기다리는 데에도 지쳐 양품점을 시작했다. 전세금을 빼서 방이 딸린 가게를 얻고, 결혼할 때 해온 살림들은 시댁으로 보내고 장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가게 인테리어를 하면서 자꾸 속이 울렁거리고 토했다. 병원에 가서 확인해 보니 임신이었다. ‘조금만 빨리 알았으면 가게를 시작하지 않았을 텐데…’ 하고 걱정이 앞섰지만, 이미 벌여놓은 일이어서 계속 진행했다.
어느 날, 남편이 연락도 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편은 놀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했는데, 논다는 것이 포커 노름을 한 것이었다. 10원도 아끼며 성실하게 사신 친정아버지를 생각하면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일은 이따금 반복되었고, 나는 남편에게 실망을 느꼈다.
남편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관광여행사를 차렸다. 내가 양품점을 해서 번 돈과 남편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은 돈, 그리고 대출 받은 돈까지 합쳐서 관광버스를 사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 무렵, 결혼한 지 4년 만에 작은 집을 하나 샀다.
여행사를 하면서 겉으로는 돈을 많이 버는 것 같았지만 나가는 돈이 많아 남편이 직장생활을 할 때가 더 나았다. 또 관광 성수기에는 바쁘게 일하다가 비수기가 되면 할 일이 없어서 남편은 전보다 더 큰 판에서 도박을 하는 것 같았다. 남편과 함께 도박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유명인들도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이 도박을 하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편은 일주일씩 연락이 끊어지기도 했다. 남편과 싸우고 다짐을 받아도 소용이 없었다.

사는 게 힘들어 23년 만에 하나님을 찾았다
사람이 다치는 사고가 나 영업정지를 당하고, 차도 자꾸 고장이 나서 결국 여행사를 정리했다. 남편이 사업하는 동안에는 어려움을 몰랐지만 경제적으로 쪼들리면서 내가 직장생활을 해야 했다. 둘째가 18개월 되었을 때 아이를 놀이방에 맡기고 직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우체국 보험 일이었는데, 1년이 지나자 능력을 인정받아 리더를 맡았다.
그때 남편이 ‘부산 신도시가 형성되는 곳에 가서 식당을 해보자’고 했다. 정리할 게 많았지만 집이 쉽게 팔렸고, 난 내려가고 싶지 않았지만 남편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신도시에는 아파트 건설현장이 많아 횟집에 밥집까지 두 개의 식당을 운영했다. 그러다 보니 굉장히 바쁘고 힘들었다. 열심히 일했지만 남편과 같이 일하면서 다투는 경우가 많아졌다.
남편도 성실하게 일했지만 스트레스가 감당이 안 되면 일하다가도 갑자기 나가서 도박판에 가는 날이 많아졌다. 장사한 돈을 다 날리고 들어오는 날도 있었다. 자연히 다툼이 잦아지면서 남편은 다른 일을 찾아 나가고, 식당 운영은 온전히 내 몫이 되었다. 남편에게 실망하고, 너무 힘든 생활 때문에 늘 이혼을 생각했다. 남편은 이혼만은 절대 안 된다고 했지만 우리 사이는 점점 멀어졌다.
사는 게 힘들어 하나님을 찾았다. 23년 만에 교회에 나갔다. 찬송가를 반주하는 피아노 소리가 지쳐 있던 나의 마음을 하나님이 알고 위로해 주시는 소리 같았다. 교회에 가면 눈물이 났다. 2년 동안은 교회만 가면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예배에도 다 참석하고 기도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설교 말씀을 들어도, 성경공부를 해도 늘 답답했다. 성경 말씀 따로 내 삶 따로였다. 법에 묶여 마음에 자유가 없는 교회 생활은 신앙과는 다른 거라는 생각이 올라왔다.

빚, 빚, 빚!
나는 식당을 그만두고 저축은행에 취직해서 여신 업무를 보았고, 남편은 운수업을 했다. 내가 보증을 서고 대출을 받아 사업자금을 마련했다. 그런데 사업이 어려워 나는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직장도 그만두어야 했다. 집도 팔고 가지고 있던 것들을 다 돈으로 바꾸어 빚을 갚았지만 남은 빚이 3억 원이 넘었다.
남편은 사업을 접고 서울로 올라가서 운전을 했다. 앞이 캄캄했지만, 두 딸을 위해서 돈이 되는 일이라면 도둑질과 간음 외에는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신 업무 경험이 있었기에 대부 중개업을 시작했다. 열심히 했고, 3~4년 만에 빚도 거의 정리했다. 그런데 그때 아는 사람의 권유로 빚을 얻어 네트워크 사업에 1억 5천만 원을 투자했다가 3개월 만에 다 날렸다. 다시 빚을 갚는 삶이 시작되었다. 차를 몰고 출근하는 길에 트레일러나 큰 트럭을 볼 때마다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많이 느꼈다.
죽을힘을 써서 돈을 벌어 빚을 갚았는데, 이번에는 데리고 일하던 사람이 돈을 횡령해서 잠적했다. 나 자신에게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 경험과 능력을 믿고 살았지만, 내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도 결국 나의 잘못된 판단으로 삶이 곤두박질쳤다. 내가 모자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삶에 대한 미련이 점점 사라졌다. 하다 하다 안 되면 조용히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바닷가에서 차를 몰고 들어가 목숨을 끊을 장소까지 봐두었다.

 

예배당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 깜짝 놀랐다
다시 ‘메리케이’라는 화장품 영업을 했다. 돈 버는 일이라면 열정을 다해서 적극적으로 했기에, 3년 만에 회사에서 인정을 받아 팀원들을 이끄는 리더가 되었다. 상으로 승용차도 받고, 미국·일본·중국·필리핀 등 많은 곳에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어느 날, 스킨 케어를 해주기 위해 간 쑥뜸방에서 나를 기쁜소식선교회로 인도한 김정순 자매를 만났다. 김 자매는 다른 제품을 홍보하러 그곳에 왔는데, 내가 하는 일을 함께 하고 싶어서 그분의 전화번호를 받았다.
그때 나는 11년째 장로교회에 다니고 있었지만 교회를 오가는 교인일 뿐이었다. 주일 예배 때 듣는 설교도 성경 말씀과 거리가 멀었기에 늘 영혼에 갈급함을 느꼈다. 교회에서는 항상 전도를 강조했지만 목마른 영혼을 채워줄 수 있는 생수 같은 말씀은 없었다. 교회에서 만나는 교인들도 겉으로만 대할 뿐, 과연 영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답답한 마음에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고도 싶어 신학교에 갈까도 생각했다.
일 관계로 만난 김정순 자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자기 교회에 와 보라는 이야기를 듣고 몇 주 후 예배 시간에 북부산교회를 찾아갔다. 우리 집에서 거리도 가깝고 지나가면서 보긴 했지만, 들어가 보기는 처음이었다. 예배당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엘리베이터 벽에 박옥수 목사님의 신간 서적을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니던 교회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있어서 ‘여기가 이단인 박옥수 목사님 교회구나’ 하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냥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한편에서 ‘이단은 뭐라고 하는지 들어보자’는 마음이 들어 예배실 맨 뒷자리에 앉았다. 목사님의 설교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그동안 내가 들었던 설교들과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성경을 찾아가면서 말씀을 전하는데, 지루하지 않고 마음에 깊이 와 닿았다.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서 많은 생각들이 교차했다. ‘이단이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야, 내가 아직 몰라서 그렇지 뭔가 있을 거야’ 하는 생각이 들고 너무 복잡했다. 인터넷에서 박옥수 목사님에 대해 검색해 보았지만 의견이 엇갈려 여전히 무엇이 옳은지 많이 혼란스러웠다. 박 목사님의 설교를 인터넷으로 직접 들어보기로 했다. 몇 번 설교를 들으면서 ‘이 말씀이 진리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는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말씀이 능력으로 역사하는 것들을 볼 수 있었다.

마침내 ‘나도 의인이다’는 사실이 마음에 깨우쳐졌다
다시 북부산교회를 찾아가 송무성 목사님과 몇 번 신앙상담을 나누었다. 나는 죄인이라고 말하는 기성 교회의 논리가 싫었지만, 의인이라는 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꾸 양심의 가책과 내 생각을 따라갔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송 목사님으로부터 성경 말씀을 듣던 중 마침내 ‘예수님이 내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에 내 죄가 다 씻어져 나도 의인이다’라는 사실이 마음에 깨우쳐졌다. 마음이 새털처럼 가벼워졌다.
구원받은 후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달았다. 성경 말씀을 믿을 때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고, 하나님이 생생하게 살아 계시고 내 안에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더욱이 형편과 상관없이 내 마음이 쉬는 세계를 알게 되었다. 형편에 눌리던 나의 마음에, 형편은 허상이고 믿음이 실상임을 알게 해주신 하나님이 감사했다.
열심히 살았지만 실패를 거듭했던 나의 지난 삶. 내가 잘못했고 노력해도 안 되어 그것이 나의 한계라고 생각했던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임을 알았다. 하나님이 그런 형편들을 통해 나를 만나시고자 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하나님이 나를 그 속에 가두어두셨고, 그 속에서 나를 건져내실 분도 하나님인 것이 확실해졌다.
구원받고 보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옳음에 갇혀서 나를 정죄하고 판단하고 살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처럼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얻었다. 구원받은 후 정말 감사하고 신기한 것은, 성경 말씀이 내 마음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역사하는 것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런 삶 속에서 나는 행복해졌다.
몇 주 전, 주일 저녁 예배 때 송 목사님이 열왕기하 4장에 나오는 ‘선지자 생도의 아내’에 관하여 말씀을 전하셨다. 그 말씀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마음에 받아들여졌다. 내 위치가 선지자 생도의 아내가 처했던 형편과 같기 때문이다. 그 여인이 엘리사 선지자의 말씀을 따라 빈 그릇을 빌려 오고, 거기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한 병의 기름을 부었을 때 하나님께서 빈 그릇마다 기름을 가득 채워 주셨다. 나에게도 하나님이 그렇게 일하실 줄 믿는다.

전부터 우리 부모님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계속 찾아간 자매님이 있었다
나를 통해 남편, 두 딸, 그리고 친정 부모님도 구원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를 드린다. 풍요롭게 살지만 마음은 강퍅하고, 내면은 외로움에 지쳐 있는 친정 부모님. 구원받고 부모님이 떠올랐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시지만 그냥 예배를 드리러 가는 교인으로만 남아 있는 부모님. 두 분에게 복음이 전해져 구원받게 되길 소망했다. 여주에도 우리 선교회의 교회가 있어서 주소를 보니 하리에 있었다. 부모님이 사시는 곳도 하리이고, 하리가 좁기 때문에 우리 집 근처에 교회가 있을 것 같았다.
부모님에게 연락해 보니, 내가 복음을 만나기 전부터 부모님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어느 자매님이 계속 찾아오셨던 것을 알게 되었다. 목사님도 이따금 우리 집을 찾아오셨다고 했다.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교회에서 신문을 가져다 주면 아버지는 이단이라고 보지도 않고 버렸어. 그런데 나는 그분들이 내가 아플 때 찾아와서 성경 이야기도 해주고 기도도 해주어서 참 좋았다.”
엄마 몸이 아파서 집안 일을 해줄 분을 찾고 있었는데, 기쁜소식여주교회의 한 자매님이 도와 주기로 했다.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선 자매님은 남편이 공장을 운영하고 자매님도 고와서 청소 일을 할 사람이 아닌데,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했다. 전에 우리 부모님 옷가게에 전도하러 갔을 때 너무 강퍅하게 대하셔서 자신의 마음으로는 가기 싫었지만 두 분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져 우리 집 일을 봐주고 계신다고 했다. 부모님도 무척 좋아하신다.
자매님이 그동안 엄마에게 신앙 이야기를 잘 해주어서 엄마 마음이 많이 열렸다. 그래서 이번 여름 수양회에 참석하겠다고 하신다. 평생 일을 하고 산 엄마는 마음에 우울함과 외로움을 가지고 계신다. 이제 복음을 만나 그 마음이 참된 위로를 받게 되길 원한다.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일하심을 이제는 안다
지난날 나는 항상 앞만 보고 달렸다. 성공하고 싶었고, 좀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의 꿈은 세상적인 것에 있었다. 그리고 내가 내 인생에서 왕 노릇을 했다. 내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삶 앞에서, 내가 왕이 되어 있으면서도 예수님께 도와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이제는 알게 되었다.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처럼, 주님이 내 안에서 일하시는 것을 가로막는 나 역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매일 기억해야 함을.
나를 구원하시고, 나의 모든 삶이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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