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살롬은 은혜를 눈앞에 두고 죽어 갔지만…
압살롬은 은혜를 눈앞에 두고 죽어 갔지만…
  • 박영찬 (기쁜소식남원교회 목사)
  • 승인 2014.08.13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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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간증 | 시각의 변화, 행복의 시작 (4회)

 

‘지금 신학교에 들어가면 아이들 학비며 생활비는 어떻게 할까?’
숱한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나의 근본 모습을 보게 하신 하나님은 나를 망하게 하여 마하나임신학교로 이끄셨다.
지난날 내 삶의 모양들은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처럼 방탕했지만, 박옥수 목사님은 선악간에 어떤 것도 묻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을 차근차근 전해 주셨다. 그리고 다시 마하나임신학교에 들어와서 복음의 일에 함께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다.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나를 거기까지 이끄신 하나님의 섭리가 보였지만 ‘이 나이에 내가 다시 훈련을 받고 복음 전도자의 길을 갈 수 있을까? 지금 이 시점에서 신학교에 들어가면 우리 아이들의 학비며 생활비는 어떻게 할까?’ 등등의 염려와 두려움으로 신학교에 들어가는 게 주저되었다.
서울에서의 삶을 다 정리하고 고향 광주로 내려가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면서 아이들의 학비를 대주며 조용히 지내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다. 사탄은 여전히 내 삶을 내가 결정하라고 부추기며 합당한 생각들을 주었다. 악밖에 없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시각이 옮겨져도, 매순간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종과 교회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사탄이 또 다시 나에게 어리석은 나의 길을 가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목사님, 저 같은 놈은 이 거룩한 교회에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하루는 기쁜소식강남교회 수요 예배에 참석해 말씀을 듣는 동안 악한 내 모습이 말씀에 비쳐져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되었다. 나는 구원받고 몸은 교회 안에 있었지만 실제 삶에서는 말씀과 전혀 상관없이 내 마음만 섬기며 살아왔는데, 그런 내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피조물인 인생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을 인생처럼 여기며 망령되이 살아온 내 모습이 말씀 안에서 보이고, 들렸다. 말씀의 눈으로 나를 보니 악밖에 없어서 그런 내 모습으로 인해 견딜 수 없었다. 설교 말씀이 끝나자마자 나는 박 목사님에게 달려갔다.
“목사님, 저는 악하고 더러운 놈입니다! 저는 정말 나쁜 놈입니다! 저 같은 놈은 이 거룩한 교회에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쫓아내 주십시오.”
목사님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무슨 소리야? 박 형제, 나도 악해. 악하니까 우린 하나야.”
목사님은 내 팔을 잡아 의자에 앉히며 말씀하셨다.
“박 형제, 악한 사람은 이 교회가 안식처고 그늘이야.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모든 걸 자기가 판단하고 교회를 떠나지만, 악한 사람은 이 교회 안에서 쉬는 거야. 여기가 보금자리야. 자네, 여기서 복음 전하고 살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에게 아버지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아버지 안에는 인자와 긍휼이 흐르고 있었다. 둘째 아들은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 안에 있는 온전한 사랑이 그를 행복의 세계로 이끌었다. 누가복음 15장 말씀이 바로 내 이야기였다.

사르밧 과부 이야기가 나를 마하나임신학교로 이끌었다
마하나임신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부담스럽고 두려웠던 나는 박 목사님을 찾아가 내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목사님은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사르밧 과부의 믿음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다. 사르밧 과부의 생각과 엘리야 선지자의 생각은 달랐다. 그때 과부는 선지자의 음성 앞에서 자기 생각을 버리고 엘리야의 말씀대로 행하였다.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항상 같을 수는 없었다. 신앙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라가는 것이었다. 열왕기상 17장 말씀이 내 생각에서 나를 벗어나게 해주었고, 마하나임신학교로 이끌어 주었다.
기쁜소식파주교회에서 지낸 3개월여 동안 나는 허물만 뿌린 자였지만, 내가 신학교로 가는 날 교회 형제 자매님들은 온 마음으로 기뻐해 주었다. 어떤 자매님은 이불을 준비해 주고, 어떤 자매님은 양말을 선물해 주고, 교회는 저녁 만찬을 마련해 주었다. 고맙고 감사해서 마음에서 눈물이 났다. 친구 허인수 목사는 육신의 세계뿐 아니라 영원한 세계에서도 친구로서 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악한 자신을 발견한 베드로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었다
마하나임신학교에서 오전에는 창세기 말씀 수업을 받고, 오후에는 전도하거나 성경공부 모임을 가졌다. 창세기 말씀을 듣는 동안 전에는 몰랐던 내 모습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흐르는 말씀의 세계는 완전하고 거룩한데 반해, 내 마음의 세계는 모든 것을 나를 위해서 계산하며 사는 야비하고 더러운 모습이었다. 그동안 살아온 내 삶 전부가 철두철미하게 나만을 위하는 삶이었다. 하나님도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말씀에 비쳐진 내 모습 앞에서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는 자가 되었다. 누가복음 5장에서, 주님과 상관없이 자기 생각만 믿고 살아온 악한 자신을 발견한 베드로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주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죄인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에게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눅 5:10)
죄인 된 베드로를 조건 없이 받으시는 주님이 놀라웠다. 동일하게 죄인 된 나를 받으시고 품어 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고맙고 감사했다.

‘내가 뭔데, 나 같은 자가 교회 안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잔단 말인가?’
교회 안에서 지내는 삶이 행복했다. 내가 세워져 있을 때에는 결코 맛볼 수 없었던 행복의 세계가 내가 죄인의 위치로 내려갔을 때 마음에 하나하나 만들어졌다. ‘내가 뭔데, 나 같은 자가 교회 안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잔단 말인가?’ 양치질을 할 때 따뜻한 물이 나오면 나 같은 자가 따뜻한 물을 쓰는 게 감사했다. 냉온수기 통에서 시원한 물을 한 모금 들이키면 그 시원한 물이 내 식도를 타고 흘러내리는 동안 교회 안에서 이런 대접을 받는 게 너무 감사했다. 새벽에 눈을 뜨는 것부터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전부 은혜였다.
썩어질 내 눈으로 녹색의 나무를 보는 게 감사했고, 내 코로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는 게 감사했고, 내 발로 도심의 아스팔트 위를 걷는 게 감사했다. 밤마다 찬송가 141장 “웬 말인가? 날 위하여…”가 내 노래가 되었다. 우리 주님은, 죄인으로 출생해서 평생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다가 영원히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베드로에게 찾아가셔서 그의 근본을 보게 하시고 구원하시며 제자를 삼으신 것처럼, 나에게도 그렇게 하셨다.
주님의 마음을 모른 채 내 옳음 속에서 살던 나는 신학교 수업시간에 말씀을 들으면서 항상 악밖에 없는 내 모습을 점점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말씀은 그동안 나를 가리고 있었던 가식의 옷을 하나하나 벗어버릴 수밖에 없게 했다.
이런 세계를 알도록 이끌어 주신 교회와 하나님의 종이 말할 수 없이 고맙고 감사했다. 마음에서 박 목사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었다. 서툴고 어색하지만, 할 수만 있으면 그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진정한 효도나 진정한 신앙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마음에서 사랑을 발견하고 마음에서 하나가 되어 섬기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 하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라.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출 21:5~6)
 
“자네를 이끄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야.”
오전에 수업을 마치면 오후에는 전도를 나가거나 성경공부를 하러 갔다. 형제 자매님의 가정에서 갖는 성경공부 모임에서 간증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이 꿈 같았고, 서초구 보금자리아파트 단지나 방배동 전원마을에서 집집마다 방문하며 전도하는 시간이 행복했다.
하루는 오후에 방배동에서 집들을 방문하며 전도하고 있는데, 민수기 23장 말씀이 떠올랐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 23:19)
나는 깜짝 놀랐다. 나에게 말씀하시고 나를 이끄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이 분명해졌다. 나는 형편 속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게 내 속에서 일하시고 계셨다. 그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 후, 박 목사님이 나를 부르셨다. 목사님은 사무엘상 14장에 나오는 ‘요나단을 이끄신 하나님’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 14:6)
요나단의 마음에 이 마음을 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다. 사울이 거느린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전쟁을 하는데, 블레셋은 병거가 3만에 마병이
6천에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았다. 그것을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은밀한 곳에 숨거나 흩어져서 사울과 함께한 자는 겨우 6백 명 가량이었다. 누가 봐도 어려운 형편, 피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요나단은 담대하게 부딪칠 마음을 가졌다. 그 마음을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요나단에게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었다. 박 목사님은 나에게 “자네를 교회로 다시 이끈 건 사람이 아니야. 자네를 이끄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야” 하고 교제해 주셨다. 요나단의 마음을 이끌어 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나를 이끌어 주신 사실을 목사님은 나로 하여금 정확히 알게 하셨다.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갖도록 교제해 주셨다.
 

 
근본을 발견하고, 마음에 선을 긋고, 주님과 교회와 하나가 되고
마하나임신학교에 있는 동안 하나님은 놀라운 당신의 세계들을 단계별로 알게 하시고, 내 마음에 가르쳐 주셨다. 내 중심적인 시각으로 사는 동안에는 전혀 맛볼 수 없는 세계였다.
내 생각을 따라 살아온 삶의 결과가 다 망했을 때 하나님은 당신의 시각으로 내 모습을 보게 해주셨다. 내 시각은 늘 나에게 관대했는데, 말씀에서 본 하나님의 시각에는 내 근본이 가시나무였다. 그처럼 나의 근본을 발견한 것이 첫 번째 단계였다.
가시나무면 결코 포도를 맺을 수 없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듯 가시나무 같이 나쁜 열매만 맺는 나는 지옥불에 던져질 운명임이 분명했다. 내게는 구원자 외에는 소망이 없었다. 그때 한밤중에 걸려온 박 목사님의 전화가 나를 기쁜소식강남교회로 이끌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했고, 마음에 선을 그었다. 룻은 누가 뭐라고 해도 더 이상 자기 생각을 따라 모압으로 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기를 섬기며 살아온 모압에서의 삶이 망한 것을 정확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마음에 선이 그어진 룻은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마음을 정하고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갔다. 박 목사님과 가진 교제 속에서 내 마음에도 그렇게 선이 그어졌다. 그처럼 마음에 선이 그어진 것이 두 번째 단계였다.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룻 1:18)
룻의 마음이 정해지고 난 후 흔들림 없는 그의 마음을 따라서 준비된 하나님의 은혜가 모압 여인 룻에게 차근차근 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에게도 동일했다. 나는 아버지 집 같은 교회 안에서 말씀을 들으며 성령의 깨우침으로 악밖에 없는 나의 실제 모습을 보았다. 가증하고 야비하며 나밖에 모르는 내 모습 앞에서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되었다.
그런데 악밖에 없는 나를 종과 교회는 하나라고 해주셨다. 하나님께서 죄인 된 나를 복음으로 주님과 교회와 하나 되게 해주신 것이 세 번째 단계였다. 복음이 놀라웠다. 복음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사랑이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둘째 아들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데, 아버지는
“아니야. 너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내 아들이야. 너는 잃었다가 다시 얻은 내 아들이야” 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아버지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맏아들이나 둘째 아들이나 아버지와 하나였고, 똑같은 아들이었다. 마음에서 하나 되지 못한 것이 자기 중심의 시각이고, 아버지를 슬프게 하는 죄였다. 하나님은 죄악 중에 출생하여 나 중심의 시각으로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는 나를 하나님 중심의 시각으로 바꾸어 주셔서 내 삶을 행복과 감사로 채워 주셨다.

‘어쩌다가 나는 이렇게 좋은…’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로부터 아무리 큰 선물을 받아도 자기를 자랑할 수 없는 것은, 그는 아버지 앞에서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내가 받은 수많은 은혜 앞에서 조금이라도 나를 자랑할 수 없는 것은, 1년 전만 해도 나는 가장 못나고 형편없는 쓰레기 같은 자였기 때문이다. 나에게 베풀어 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하면 밤마다 울지 않을 수 없었다.
‘1년 전에 나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나?’
‘6개월 전에 나는 어떤 마음을 품고 살고 있었나?’
‘어쩌다가 내가 이런 큰 은혜를 입었나? 북한 땅에 태어났으면 나는 어쩔 뻔했나? 율법시대에 태어났다면 나는 어쩔 뻔했나? 어쩌다가 나는 은혜시대에 태어났고, 복음을 만났는가?’
‘어쩌다가 나는 이렇게 좋은 부모님 아래서 태어났고, 좋은 아내를 만났고, 좋은 아들딸을 얻었는가?’
‘어쩌다가 나는 이렇게 좋은 교회를 만났고, 좋은 목사님을 만났는가?’
생각하면 할수록 주의 은혜가 고맙고 감사했다. 내게 주어진 것들 하나하나가 내 마음에서 보석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해가 되어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믿고 따르는, 네 번째 단계
사무엘하에 나오는 압살롬은 은혜의 문턱에서 요압의 창에 심장이 찔리고, 요압의 병기 맡은 소년들에게 에워싸여 비참하게 죽는다.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저만치 앞에 있었건만 압살롬은 그 사랑을 맛보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압살롬이 행한 악보다 훨씬 큰 사랑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건만 그는 그 사랑을 만나지 못하고 슬프게 죽고 말았다.
자기 중심의 시각으로 자신을 믿으며 늘 옳은 자로 살았던 압살롬. 아버지 다윗 왕이 맛본 은혜의 세계를 몰랐던 압살롬. 그런 압살롬이 패배자가 되었을 때, 고개를 들 수 없는 부끄러운 죄인이 되었을 때, 다 망한 자가 되었을 때,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랍게 그에게 와 닿을 수 있었을까! 그가 죄인이 되었을 때 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얼마나 놀라운 축복의 세계로 이끌었을까! 아버지 다윗 왕은 압살롬에게 임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가슴이 설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압살롬은 은혜를 맛보지 못하고 죽었다. 은혜의 세계를 만나지 못하고 죽어버린 압살롬이 다윗의 마음을 한없이 아프게 했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 18:33)
자식 압살롬을 향한 아버지 다윗 왕의 눈물은 나 같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압살롬은 아버지의 사랑을 만나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어갔지만, 나는 어쩌다가 은혜를 이리도 많이 입었는지 그 큰 사랑을 만난 것이다.
마하나임신학교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아버지의 은혜 안에서 사는 기적의 연속이었다. 새로운 세계를 보여 주신 박 목사님이 고마워서 마음의 작은 표현으로 찹쌀떡을 사드렸다. 신앙은 인도자를 믿고 따라가는 거였다. 네 번째 단계는 종과 교회를 믿고 따르는 단계였다.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같을 수 없기에, 이해가 되어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믿고 따르는 것이 무지한 나를 복되게 하는 것이었다.
나를 이끄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이 분명해졌을 때, 내 마음에서 장래에 대한 모든 염려와 나와 관계된 것들에 대한 모든 계획이 동시에 내려놓아졌다. 내 인생의 모든 시나리오가 주인 되신 예수님에게로 넘어갔다. 나의 모든 장래를 주님께 맡기고 쉬는 마음이 생겼다.

2013년 6월 초 오후, 어느 자매님의 아파트에서 성경공부 모임을 가지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갑자기 나에게 기쁜소식남원교회의 목회자로 가라는 연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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