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의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만난 복음
다섯 번의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만난 복음
  • 송문희
  • 승인 2014.09.11 10: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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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간증

 
       길지 않은 인생 동안 다섯 번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송문희 형제.

       왜 그 일들이 자신에게 있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는 그가

       하나님 안에 속하기까지의 삶 이야기를 들어본다.

 

 
 

“정말 짜증나네! 이제 그만!”
“화만 낼 게 아니라 내 말 들어봐. 예수님께서 나와 너, 우리 가족,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어.”

계속되는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어서 단번에 잘랐다.
“됐다고!! 왜 자꾸 헛소리하는 거야? 예수를 믿든 부처를 믿든 누나 혼자 믿을 거지, 왜 자꾸 사람을 짜증나게 만드는데? 내버려둬!!”
내가 갓 스무 살 넘었을 때이다. 당시 누나는 교회에 다닌 후로 눈만 마주치면 예수님 이야기를 하고 다녀 가족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난 화를 내며 누나를 멀리하며, 누나를 광신자로 여겼다.

 

첫 번째 죽음의 고비와 어그러진 삶
나는 가난하지도 부유하지도 않은 집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래도 언제나 제일 좋은 운동화를 신고 제일 좋은 옷을 입으며, 부모님의 그늘 아래서 철모르고 자랐다. 여섯 살 때 대형 트럭에 치여 목숨을 잃을 뻔했다. 병원마다 가망이 없다며 받아주지 않았지만, 한 대학병원에서 목에 구멍을 내어 숨통을 열고 응급처치를 하여 한 달 만에 의식을 찾았다. 하지만 오른쪽 팔다리를 쓰지 못해 휠체어를 의지하다, 8개월 만에 걸을 정도가 되어 퇴원했다. 내가 죽을 고비를 넘긴 첫 번째 일이었다. 가까스로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다리도 절고 말도 어눌한데다가, 체격 또한 왜소해 친구들에게 시달림을 받았다. 3학년 때부터 다리 상태와 말하는 것은 정상이 되었지만, 키는 난쟁이가 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작았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이 되자 거짓말처럼 한 학기에 키가 27㎝ 이상 자라 또래 아이들과 같은 키와 체격이 되었다. 그때 사춘기를 함께 겪으면서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 일 핑계로 집에 들어오시지 않는 아버지, 아침에 일하러 나가 늦은 밤에 오시는 어머니,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3학년이 되어서는 전에 나를 괴롭혔던 친구들에게 복수한다며 폭력을 휘둘렀다. 가까스로 입학한 고등학교에서도 늘 싸움질이었다. 어머니께서 “막내아들 덕에 모르는 경찰서가 없다” 하실 정도였다.

 

두 번째 죽음의 고비 -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온 몸에 힘을 뺐다
스무 살이 되자, 누나가 나에게 먼저 다가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라고 했다. 평생 사람 안 될 것이라고 하던 누나가 먼저 말을 걸어온 게 신기해서 누나의 소원인 여름수양캠프에 가기로 약속했다. ‘수영캠프’로 잘못 들어 휴양지에서 놀고 먹고 수영하는 것인 줄 알고, 내 차에 술 한 박스를 싣고 혼자 가면 심심할 것 같아 한 친구와 동행했다.
수양회 장소에 도착한 나와 친구를 보고 누나는 감동받은 듯 해맑게 웃으며 굉장히 좋아했다. 하지만 난 준비해 간 텐트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친구와 술판을 벌였다. 그리고 이틀 후, 누나와의 약속은 지켰다고 여겨 친구와 함께 아침 일찍 차를 몰고 돌아왔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리 단순하고 어리석었는지 모르겠다.

두 달 후, 친구들과 한탄강에 놀러갔다. 전날 내린 폭우로 물살이 거센 강을 수영으로 빨리 건너가기 내기를 하자고 밀어붙였다. 친구들이 겁난다며 포기하자 혼자 강물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중간쯤 갔을 때 몸이 앞으로 나가질 않았다. 소용돌이에 빨려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힘을 다해 팔과 다리를 저었지만 더 빨려들어갈 뿐이었다. 힘이 빠지고 폐가 터질 것처럼 숨이 차올라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온 몸에 힘을 뺐다.

가족들의 얼굴이 하나 하나 스쳐지나갔다. 수양회 때 누나를 속상하게 했던 일이 떠오르며 ‘하늘에서 나를 벌주시는구나’ 하는 짧은 후회가 들었다. 얼마나 몸에 힘을 빼고 숨을 참았을까? 마지막으로 숨을 한 번 들이마시려고 고개를 위로 쳐드는데, 갑자기 몸이 소용돌이 바깥으로 튕겨나감을 느꼈다. 쭉 뻗은 손끝에선 딱딱한 것이 느껴졌다. 건너편 바위였다.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젖 먹던 힘을 다해 물장구를 쳤고, 이를 악물고 바위 위로 올라가 벌러덩 누워 한참을 숨을 헐떡거렸다. 두 번째 죽음의 고비였다.

누나와 교회에 대한 생각은 그때뿐이었다. 누나가 자꾸 구원에 대해 이야기해, ‘빨리 시집가야 쓸데없는 말 안 한다’는 생각으로 처음으로 두 손 모아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누나가 제발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해주세요. 그래서 교회 다녀라, 하나님 믿어라 하는 이야기를 듣지 않게 해주세요. 아멘.” 장난스레 기도했는데, 얼마 후 누나가 결혼했다. 무척 기뻤지만 나만의 오산이었나? 그 후로는 누나와 매형이 손잡고 와서 구원받으라고 노래를 했다.

 

 
세 번째 죽음의 고비와 깊은 죄의식
스물 여덟이던 1999년 11월, 내 인생에서 최악의 사고를 저질렀다. 음주운전으로 남산3호터널 요금 정산소를 브레이크도 밟지 않고 충돌하여, 함께 탄 사람은 현장에서 죽고 차는 전복되어 100미터 가량을 굴렀다. 사고현장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출동한 구조요원들이 차가 납작하게 찌그러져 뒤집혀 있는 것을 보고 다 죽었다고 판단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차 속에서 나오는 작은 신음소리를 듣고 짧은 시간에 차를 절단한 후 나를 구해냈다. 세 번째 죽음의 고비였다.
며칠 만에 의식을 차렸지만, 내 잘못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제정신이 아니었다. 죄의식과 피해의식을 견디지 못해 한 달 만에 퇴원하여 경찰서로 찾아갔다. 사건 조사가 끝나고 구치소로 갔고, 그 뒤 교도소로 이송되었다. 1년 6월의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아버지의 노력으로 9개월 보름 후에 출소했다.

 

네 번째 죽음의 고비 - ‘타국에서 사막에 묻혀 죽는구나!’

출소 후, 자괴감에 아무 일도 못 하다가 아버지께서 아는 분이 계시는 멕시코로 떠났다. 그곳은 참 좋았다. 사고 후 손목, 허리, 다리가 안 좋았는데, 습기가 없는 기후 까닭에 결림이 없었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있었던 좋지 않은 일들을 잊고 살 수 있었다. 우연히 ‘떼삐또’라는 재래시장에서 한인韓人들이 돈을 버는 것을 보고 ‘여기서 평생 살자’는 생각이 들었다. 한인 양말 가게에서 일하며 대학에 입학하여 스페인어를 배워, 1년이 지나자 현지인과 대화가 가능하고 양말 유통에 대해서도 대략 알게 되었다. 운이 좋았는지, 마침 큰 일을 잘 처리해 꽤 큰 돈을 손에 쥐었다. 거기에 미쳐 양말 유통에 전념했고, 돈을 쉽게 벌었다. 욕심이 과했던지 양말 컨테이너 수입에 손을 댔고, 돈이 모자라 현지 사채업자에게서 돈을 융통했다가 기일 내에 갚지 못해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이틀 만에 잡혀 사막으로 끌려갔다. 늦은 밤, 사막 한가운데에서 두 사람이 2m 깊이로 구덩이를 파더니 나를 밀어넣고 묻기 시작했다. 흙이 목까지 차자 그들은 구덩이의 50㎝ 정도는 그냥 두고 말 없이 떠나버렸다.
내 생애 최고의 공포를 느낀 순간이었다. 밤이다 보니 보이는 것이 없어 무서웠고, 방울뱀이나 전갈이 지나가다가 내가 묻힌 구덩이에 빠져 얼굴을 물거나 독침을 쏘아 고통 속에서 죽어갈 것이 두려웠다. 더 무서웠던 것은, 사지와 가슴을 서서히 조이는 흙더미였다. ‘죽을 고비를 잘도 넘겼건만 이렇게 타국에서 사막에 묻혀 죽는구나!’ 하며 울고 있을 때, 멕시코 국경수비대가 신고로 받고 내가 있는 위치로 정확히 찾아와 구해 주었다. 네 번째 죽음의 고비였다.

 

다섯 번째 죽음의 고비 - 벽에 박힌 못에 코트 끈을 걸고 목을 매었다
몇 년이 지나, 우여곡절 끝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직장도 잡고, 몇 년 후에는 결혼하여 가정도 꾸렸다. 그리고 사업을 시작했다. 첫 아이를 낳을 무렵, 사업을 지탱하기 어렵더니 결국 부도가 나고 말았다. 채무액은 감당하기 어려운 큰돈이었다. 대출받을 때 담보로 설정한 집은 이자 상환 연체를 거듭해 경매 처리되었다. 아내와 다툼이 시작되었고, 다툼이 잦아져 나중에는 큰 싸움이 되었다.  하루는 지속되는 싸움에 지쳐 홧김에 집을 나왔다. 이전의 빈 사무실로 가서 술을 마시다, ‘가족에게도 무시받으며 살면 뭐하나? 나 하나 없어지는 것으로 가족에게 넘어갈 빚은 덜어 주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벽에 박힌 못에 코트 끈을 걸고 목을 매었다. 갑자기 숨이 막히고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고통이 이어졌다! 목에 감겨진 끈을 풀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안 되었다. 조금이라도 더 버티기 위해 혀가 길게 늘어지고, 아등바등 몸부림을 쳤다. 순간! 박혀 있던 못이 ‘절그럭’ 하며 빠져 ‘쿵’ 소리와 함께 몸이 바닥으로 굴렀다. 그 와중에도 목에 감긴 코트 끈을 풀며 아주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어서 “아, 죽을 뻔했네” 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다섯 번째 죽음의 고비였다. 아내는 내가 집에 들어오지 않자, 핸드폰 추적을 했는지 경찰과 함께 사무실로 찾아와 눈만 껌뻑이고 있는 나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매형의 설교를 듣던 아내가 갑자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어려운 생활로 인한 부부싸움은 계속되었다. 지긋지긋하고 전쟁 같은 삶을 살고 있을 때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나 부부는 당시 기쁜소식강북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누나는 ‘교회에서 바자회를 하는데, 네가 입을 만한 옷들이 많으니 와서 보고 마음에 들면 입으라’고 했다. 내 형편이 어려우니 그렇게라도 돕고 싶다고 했다. 그날 밤, 아내와 아이와 함께 누나를 만나고 옷 몇 가지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왠지 기분이 씁쓸하고 좋지 않았다. 옆에서 아내가 “주말에 누나한테 가서 하룻밤 자고 주일 예배에 참석하자” 하는데, 서로 마음이 통했던 모양이다. 주말에 다시 누나를 만났다. 다음날 주일 예배에 참석해서 매형의 설교를 듣는데, 아내가 갑자기 눈물을 주르륵 주르륵 흘렸다. ‘악어의 눈물’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힘든 나날을 보내다 여기 와서 억울함과 괴로움이 복받쳐 우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아내는 생전 읽지 않던 성경을, 어디서 구해왔는지 밤새 읽었다. 다음날에도 또 그렇게 성경을 읽었다. 한동안 퇴근한 후 집에 오면 성경 읽는 아내의 뒤통수만 빤히 쳐다보다 잠들었던 것 같다.

 

차를 갓길에 세워놓고 아주 오랫동안 통곡하듯 울었다.
며칠 후, 아산에 있는 거래처에 가는 길에 기독교에 대해 생각하다가 핸드폰으로 기쁜소식선교회를 검색해 보았다. 그리고 어플을 다운받아 박옥수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목사님은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옳지 않은 청지기’에 대해 말씀하고 계셨다. 한참을 듣다가, 가슴에서 무엇인가 복받쳐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나로서는 감당키 힘들어 울음이 터졌다.
‘지금 하시는 말씀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구나!’
목사님이 전하시는 말씀이 내 상황과 너무 맞아떨어져, 꼭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지켜보다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하나님께서 나의 빚, 나의 죄를 사하여 주실까? 누나와 매형이 20년 이상 그렇게 복음을 들려주었는데, 무시하고 오히려 광신자 취급하며 온갖 저주의 말을 퍼부었던 내 죄를 용서해 주실까? 내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
차를 갓길에 세워놓고 아주 오랫동안 통곡하듯 울었다. 울음을 그치고 나니, 머리 속을 짓누르던 무거운 돌덩이가 들어올려진 것 같고, 가슴속에 꽉 막혔던 큰 응어리가 빠져나간 것 같았다. 너무도 시원하고 가벼웠다. 아내가 설교를 들으면서 왜 그렇게 한없이 울었는지가 생각났다.
그 주일에 예배에 참석해서 매형에게 복음을 들었다. 전에는 매형이 하는 이야기로만 들었는데, 그날은 하나님의 종이 하시는 말씀으로 들렸다. 예수님이 내 죄를 사하신 사실이 마음에 그대로 믿어졌다. 내 죄를 다 사함받고 나도 구원받은 것이다.

 

 
“하나님, 가족이 흩어지지 않을 수 있는 소중한 거처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올 봄, 우리가 살던 집을 경매로 낙찰받은 사람과 이사 비용과 일시 등에 대해 장시간 타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가 ‘강제집행 진행중’이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하던 일을 멈추고 정신없이 집으로 갔지만, 도착했을 땐 이미 모든 살림이 보관창고로 옮겨지고 현관문은 다른 잠금장치로 바뀐 후였다. 이상하게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침에 출근할 때까지만 해도 우리 집이었던 곳 앞에서 망연자실하며 갈 곳이 없어 서성일 때, 아무것도 모르고 “왜 집에 안 들어가?” 하고 재촉하는 다섯 살 아들을 보며 무능한 부모라는 생각에 눈물이 주륵 흘렀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어디 가서 자야 하나? 당장 내일부터는 어떡하나?’ 하고 걱정할 때, 전부터 우리 상황에 대해 알고 있던 지인知人이 달려와 ‘거할 집을 가까스로 얻었다’고 했다. 아주 작은 돈도 아끼는 사람이라 기대를 전혀 안 했기에 큰 고마움을 느꼈다. 생필품만 챙겨, 경기도 이천의 어느 시골 마을에 있는 원룸으로 이사했다. 조그마한 방 안에 주방과 화장실이 있었다. 이전의 집과는 비교가 안 되는 작은 집이었지만 궁궐 같았다. 짐 정리를 마치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어린 아들을 포함해 우리는 두 손 모아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답이 전혀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비를 피할 수 있고 바람을 막을 수 있고, 저희 가족이 흩어지지 않을 수 있는 소중한 거처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란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우리 가족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옆에서 아내가 울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하고 급하게 기도를 마쳤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함께 울었다.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매형에게 상황을 이야기하고 기쁜소식이천교회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아들이 강북교회에서는 또래가 많은데도 엄마에게만 붙어서 예배 시간 내내 칭얼거렸는데, 이천교회에서는 첫날부터 아이들과 신나게 어울렸다. 덕분에 아내는 목사님 말씀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나도 변했다. 회사 사장님이 기독교에 대해 배타적인 데에도 직원들을 모아 목사님을 모시고 집회를 가졌고, 나도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시작했다. 아내도 변했다. 한번은 교회 형제 자매님들이 구역 집회 장소를 우리 집으로 정했다. 자존심 강했던 아내는, 단칸방이고 직장에서 2시간 걸려 퇴근한 직후였지만, 피곤한 기색 없이 간식까지 장만하며 형제 자매님들을 진심으로 반겼다. 그 모습이 신기해 “우리 집에서 구역 집회한 것 괜찮았어?” 하고 묻자, 아내는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이젠 마음의 빚을 갚고 떳떳해졌고, 거듭났어. 다른 일들도 신기하게 전개되었다. 창고에 보관중이던 살림을 찾으려면 큰 돈을 지불해야 하고, 기간 내에 못 내면 경매 처리될 상황이었는데 낙찰자가 마음을 돌리고, 경매 대리집행인 또한 마음을 돌렸다. 그 외에도 우리에게 불이익을 주어야 할 사람들이 이익을 주는 사람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채권자들도 마음을 돌렸다. 돌아보니, 우리가 기도한 일들을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셨다.

 

행복이 무엇이냐고 나에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구원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성경을 잘 모르지만 내가 탕자인 것은 확실히 안다. 하나님은 나를 거듭나게 하셔서 새 삶을 살게 해주셨다. 구원받고 처음에는 집 문제를 해결하고 돈을 벌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점점 ‘지혜로운 사람이 되게 해주시고, 나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구원받아 참되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가 바뀌었다.
하나님은 나와 가족에게 거듭남을 주시고, 행복과 감사를 주셨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전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셨다. 구원받기 전과 후의 삶은, 비교라는 단어조차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일이 되었다. 얼마 전부터는 누나를 집에서 내쫓기까지 하신 부모님이 기쁜소식대천교회에 다니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행복이 무엇이냐고 나에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하나님을 믿으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 20여 년을 포기하지 않고 나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신 매형 오영일 목사님, 그리고 구원받은 후 나와 아내의 입에서 복음이 흘러나오도록 이끌어 주시는 우리 교회 오정환 목사님에게 감사 드린다. 두 분 성이 같아서 나는 오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무척 좋아졌다. 나와 우리 가족에게 이 모든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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