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처럼 마음에 주인을 두고 사는가?
야곱처럼 마음에 주인을 두고 사는가?
  • 김광운 (베냉 선교사)
  • 승인 2014.09.12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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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수기(9회)

 

실명할까 두려워 찾아온 형제
어느 토요일 저녁, 한 형제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사님, 제가 지금 목사님을 뵙고 교제하고 싶습니다.” 다음날이 주일이어서 예배 후에 만나면 안 되겠느냐고 하자, 지금 만나고 싶다고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그 형제가 도착했다. 형제를 보니, 한 쪽 눈이 굉장히 작아 보였다. 보는 즉시 ‘아, 형제가 눈이 안 좋아서 교제하러 왔구나’라고 느낄 수 있었다. 형제는 ‘한 쪽 눈이 이상해 안과에 가서 의사를 만났는데, 의사가 말하기를 잘 치료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실명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고 이야기했다. 그 후 병원에 몇 차례 가서 치료를 받았지만 호전되지 않아 굉장히 두려운 마음이 일어나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형제는 한 쪽 눈을 잃으면 나중에는 다른 쪽 눈도 잃게 된다고 의사가 말했다고 하였다.

“형제는 자신의 결정을 좇아 살아가고 있는 에서예요”
나는 형제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형제, 형제는 야곱인 것 같아요, 아니면 에서인 것 같아요?” 하고 물었다. 형제는 즉각적으로 “목사님, 저는 야곱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나는 형제가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형제, 성경에 야곱은 종용한 사람이고, 에서는 들사람이라고 했어요. 짐승은 들짐승과 집짐승이 있는데, 그 차이가 뭐냐면 들짐승은 날렵하고 강하지만 주인이 없고, 집짐승은 그다지 강하거나 날렵하지 않지만 주인과 더불어 사는 거예요. 집짐승은 그렇게 강하지 않아도 주인이 있기 때문에 병이 들거나 아플 때 주인이 돌봐줘요. 그런데 들짐승은 주인이 없으니까 아플 때 자신이 해결해야 해요. 성경에서 에서는 들사람, 그러니까 주인이 없는 들짐승과 같은 사람이고, 야곱은 주인이 있는 집짐승과 같은 사람이에요. 자, 형제는 둘 중에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형제는 다시 “난 야곱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마음에서 주인과 함께 살아가는 야곱이라고 하였다. 나는 형제에게 주인 없이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지만 형제는 계속해서 자신이 야곱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 형제에게 “야곱의 마음에는 리브가가 있었고, 리브가의 인도를 받았는데, 형제의 마음에는 교회가 있고 교회의 인도를 받은 적 있어요?” 하고 물으며, “형제는 주일에도 어쩌다 한 번씩 교회에 오잖아요” 하고 덧붙였다. 그러자 형제는 “목사님, 교회에 자주 오지는 않지만 동네에서 복음을 전하며 항상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주일에 교회에 자주 못 나온 이유는 집이 너무 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형제, 형제 마음에 주인이 있다면 어떻게 주일예배에 나오는 것조차도 힘들어하겠어요? 주인 없이 살아가니까 그렇지요. 교회도 오고 싶으면 오고 싫으면 오지 않고, 형제는 자신의 결정을 좇아 살아가고 있는 에서예요.”
그제야 형제가 이야기를 귀담아 듣기 시작했다.
“교회가 집에서 멀다고 했는데, 교회에 오는 데 드는 교통비 때문에 오지 못한 것 아니에요? 그 교통비 아끼려고 했지만 지금까지 치료받는 데 들어가는 돈이 훨씬 많잖아요.”
형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형제가 야곱처럼 마음에 교회가 있고 주인이 있다면, 그리고 그 주인의 결정으로 살아간다면 왜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겠어요? 하나님이 일하시면 그 눈을 하나님이 치료하실 겁니다. 병원에 가지 않아도 하나님이 치료하실 거니 하나님을 기다리세요.”
그 후로 형제는 주일마다 먼 거리에서도 일찍 교회에 와서 예배에 참석했다. 주일예배는 결코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병원에 가지 않았지만 형제의 눈이 점점 정상으로 돌아왔다.

‘내가 종이라면 당연히 주인의 결정을 따르는 것인데, 왜 고민하고 있나?’
우리는 주인 없이 내 경험, 내 판단을 토대로 내가 주인이 되어서 살아갈 때가 많다. 야곱처럼 어머니의 인도를 받아서 살기보다 에서처럼 스스로 결정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박옥수 목사님이 처음에는 가나에서 월드캠프를 인도하셨고, 이후 토고에서도 월드캠프를 하기 시작했다. 토고 월드캠프 때 많은 선교사님들이 오셔서 각기 부서를 맡아 일했다. 굉장히 바쁜 일들이 많아서 나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에게 그라시아스합창단에서 나를 찾는다고 하였다. ‘그라시아스합창단에서 왜 나를 찾을까?’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합창단이 지내던 곳에 가서 혹시 나를 찾았는지 물었다. 합창단 사람이 그렇다고 하며 ‘혹시 딸(레아)을 대전에 있는 음악학교에 보내고 싶은 마음이 없냐?’고 물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아이에게 음악을 가르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딸이 내 옆에서 복음 전하는 일을 도우며 필요할 때 불어 통역을 하며 지내는 삶을 생각하고 있었다. 합창단에서는 ‘딸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싶으면 월드캠프 기간 중에 결정해 달라’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속에서 ‘음악을 가르친다, 음악을 가르친다’ 하고 계속 중얼대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가 음악에 소질이 있나?’ 하는 생각도 들고, 여러 가지 생각이 마음속에서 교차했다. 결국 나는 월드캠프 기간 중에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월드캠프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딸을 음악학교에 보내는 부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한참 생각하다가 ‘그래, 내가 교회에서 사는데 내가 종인가, 주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내가 종이라면 당연히 주인의 결정, 즉 교회의 음성을 듣고 사는 것인데, 내가 왜 고민하고 있나? 아! 나는 지금까지 교회에서 주인 행세를 하고 살아왔구나. 들짐승처럼 주인 없이 내가 주인이 되어서 살고 있었구나. 내가 진정 종이라면 당연히 주인의 결정을 따라야 하는데,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바로 그라시아스합창단에 전화해서 딸이 언제 음악학교에 들어가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딸을 대전에 있는 음악학교에 보냈다.

 
요셉이 어떻게 아버지의 팔을 옮길 수 있는가?
우리가 교회에서 살지만, 주인을 모시고 사는 종이 아닌 주인 행세를 하고 살 때가 많다. 우리가 종이고 교회가 주인인데, 내가 주인이고 교회가 종이 될 때가 많다.
창세기 48장 14절에서, 요셉이 아버지 이스라엘(야곱)의 축복을 받게 하려고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왔다. 그때 이스라엘이 손을 어긋나게 하여 오른손을 둘째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장자 므낫세의 머리에 얹었다. 요셉이 그것을 보고 아버지의 오른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며,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하고 말했다. 그러자 이스라엘이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라고 하였다.
요셉은 야곱의 팔의 위치를 바꾸려고 했다. 그 팔은 아버지의 팔이었다. 요셉이 어떻게 아버지의 팔을 옮길 수 있는가? 우리도 교회에서 하나님의 결정, 교회의 결정을 옮기려고 할 때가 많다. 그러나 요셉이 아버지의 팔을 옮길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결정, 교회의 결정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이지 옮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곳에서 선교하면서 교회의 결정을 따르기보다 교회의 결정을 바꾸려고 하는 형제 자매들이 있는 것을 본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기에 형제 자매들이 교회의 결정을 바꿀 수 없는데도, 교회에서 자신이 종이 아니기에 교회의 결정을 무시하는 것을 본다.
이스라엘은 요셉이 자신의 팔을 바꾸려고 했을 때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라고 하였다. 요셉은 아버지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에 주인이 없기에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결정으로 교회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셉의 눈이 잘못되었던 것이지, 이스라엘이 실수한 것이 아니었다. 교회에서 내 눈이 잘못된 것이지, 교회가 실수하지 않는 것이다.
야곱은 마음에 주인이 있었고, 주인의 인도를 받아서 살아가는 종용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야곱처럼 주인의 인도를 받아서 살아갈 때 야곱처럼 복을 받으며 사는 것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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