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에 돌아온 탕자
30년 만에 돌아온 탕자
  • 이상준(기쁜소식전주교회)
  • 승인 2015.03.03 0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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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간증

 

 

중학생 시절이었던 것 같다. 전주에 사시는 큰이모께서 구원받으신 후 우리 가족을 교회로 인도하셨다. 이모 아들인 김성훈 목사님(기쁜소식한밭교회)과 김지헌 선교사님(캐나다), 그리고 사촌인 유동인 형제와 함께 나란히 앉아 김동성 목사님(기쁜소식대구교회)이 전해 주시는 복음을 들었다. 내 죄가 예수님의 피로 씻어져 내가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어 기뻤다.
 학교 선생님이었던 아버지가 교직을 그만두고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잘못되어 빚쟁이들에게 쫓겨다니셨다. 어머니도 나와 동생을 데리고 화장품 외판원도 하고 식당 일도 하시는 등 우리 가족은 어렵게 살았다. 교회를 다녔지만 삶이 점점 어려워지자 ‘하나님이 뭐 이래? 당신을 믿으면 잘살게 해줘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교회를 떠났고, 군산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했다.
 체육과를 다녔던 나는 학교에서 의류학과에 다니던 아내를 만났다. 나에게 마음을 써주는 아내가 좋았고, 우리 집과 달리 집안이 부유해 항상 모자람 없이 사는 아내가 좋아 보였다. 아내는 무엇 하나 모자라지 않게 나를 뒷받침해 주었다. 운전면허를 따라고 하더니 차도 사주었다. 시간이 흘러 우리는 결혼했고, 나는 착하고 예쁜 아내가 좋았다.
 결혼한 후, 아내는 나에게 절에 다니자고 했다. 장인어른이 한국통신에 다니다가 일찍 퇴직하고 통신 건설업을 시작하셨는데, 처음에는 가난하게 살다가 장모님이 절에 다니며 지극 정성으로 빌고 공을 들이니 잘살게 되었다고 했다. ‘잘살게만 해주면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무슨 상관이냐?’ 하고 아내와 함께 절에 다녔다.
 그 절의 스님이 나를 보더니 ‘집안에 불에 타죽은 귀신이 있으니 천도재를 지내야 한다’고 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여서 어머니께 여쭈어 보았다. 어머니는 할아버지 형제 중에 꼽추였던 분이 두 분 계셨는데, 어른들이 집을 비울 때 나가지 못하게 문을 잠갔다가 불이 나는 바람에 죽었다고 하며, ‘네가 어떻게 알았냐?’고 깜짝 놀라셨다. 나 또한 신기해서 제법 큰 돈을 들여 천도재를 드렸다. 그리고 며칠 후, 부모님이 전주 인근의 봉동 공단 내에 있는 큰 공장에서 구내식당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 친구 분이 그 공장의 사장님으로 오셨던 것이다. 당시 아버지 연세가 예순이셨기에 나에게는 기적 같은 일로 보였다. 내가 천도재를 드려서 복을 받은 것 같았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1995년에 학사장교로 해병대에서 복무했고, 5년 후 제대하여 경찰 간부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때 IMF사태가 터져 처가의 사업이 갑자기 기울어져 내가 사업을 맡게 되었다. 사업을 하면서 절에 정성도 더 많이 드렸다. 그 까닭인지, 어려운 중에도 사업이 날로 번창했다. 상당히 많은 매출을 올리며 승승장구했다.
 어머니가 “상준아, 네가 어렸을 때 복음을 들었는데 교회에 다녔으면 좋겠다”라고 하셨지만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준 게 뭐가 있어요?”라고 되물었다. 그 뒤로 어머니는 교회 이야기를 꺼내시지 않았지만, 큰이모는 나를 볼 때마다 교회에 가라고 하셨다. 그때마다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이 싫어서 “예,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목사님들이 돈을 잘 버는 나에게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IMF 사태 여파로 공사 이익금이 많지 않아 경매 공부를 하여 2003년부터는 경매 일을 시작했다. 나중에는 아파트를 30여 채 보유했다. 나보다 잘난 사람이 없는 것 같고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정부에서 부동산 투기를 근절하려는 정책을 펴면서 부동산 시장이 급속히 얼어붙었다. 이미 꽤 많은 돈을 벌었기에 만족할 만도 했지만 돈에 대한 욕심을 그치지 않았다. 룸살롱, 사채놀이, 오피스텔 사업…. 하지만 일이 자꾸 꼬였고, 오피스텔 사업을 하면서 투자한 돈은 사기를 당했다. 원금이라도 찾으려고 쫓아다니다가 몸도 망가졌다.
 어느덧 나는 은행 이자에 시달리는 신세가 되었다. 자살을 생각하고 수면제를 먹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내는 살아만 있으면 자기가 뭐든지 해보겠다고 울며 호소했다. 정신을 차리려고 신문배달과 식당 일을 시작했다. 나중에는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해 ‘인력공사’에서 일했다. 새벽 5시에 출근해 밤 11시에 퇴근하는 고단한 삶이었지만 성실하게 살아 보려고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함께 일하던 직원이 창업하자고 해서 따라나섰다가 또 그 사람으로 인해 어려움을 실컷 당했다. 고된 업무로 몸도 많이 망가졌다. 몸이 굳어지고 조금만 움직여도 손발이 퉁퉁 붓고, 결국 도저히 일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2013년 12월 말부터는 집에서 쉬었다. 조금 모아놓은 돈으로 생활비라도 벌려고 주식을 시작했다가 그마저도 6개월 만에 다 날렸다. 아내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며, 나를 정신병자라고 하며 이혼하자고 했다. 가족에게도 버림받는 못난 놈이 되었다는 생각에 돈을 잃었을 때보다 더 비참했다.
 몇 년째 연락을 끊고 지냈던 어머니에게 울며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가 집으로 오라고 하여 지극 정성으로 돌봐 주셨지만 가족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매일 밤 눈물을 흘리며 죽음을 생각했다.
 어느 날, ‘교회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즈음에 어머니가 교회에 한번 가보자고 조심스레 말을 꺼내셨다. 전에 했던 행동이 있어서 ‘어머니 소원이라니 들어 드린다’며 따라나섰다. 얼마 후 2014년 여름 캠프가 시작되었고, 이모들에게 떠밀려 실버 캠프에 참석했다. 복음반에서 말씀을 들었는데, 마음이 무거워서인지 말씀이 잘 들리지 않았다.
 하루는 저녁 말씀 시간에 허인수 목사님이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요 11:4)는 말씀을 읽으신 후, 우리가 당하는 모든 문제와 실패가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면 죽게 되는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라고 하셨다.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왔다. 갑자기 마음이 편해지고 고요해졌다. 그 후로는 목사님들이 하시는 말씀들이 마음에 들어와 돌판에 새겨지듯 내 마음에 새겨지는 것 같았다. 나는 안 되는 인간이기에 우리 죄를 사하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는 말씀도 마음에 새겨졌다.
 전에는 목사님들을 가난하다고 무시했는데,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을 다 내려놓고 무엇이라도 하는 목사님들의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복음 때문에 이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복음이 더욱 귀하게 여겨졌다. 그 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마음에는 항상 소망이 샘솟았다. 건강도 급속도로 좋아졌다. 다이어트를 시작해서 몸무게를 22kg 가량 줄였고, 망가진 간도 깨끗해졌다. 먹고 있던 심장 약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끊었는데, 의사 선생님이 심장이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내 모습이 변하면서 아내도 마음이 풀려 조금은 나아진 모습으로 나를 대하기 시작했다. 큰 딸 보연이는 굿뉴스코 해외봉사 훈련을 받으며 구원도 받고 러시아 모스코바로 파견되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을 찾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분명히 준비하셨으리라 생각되기에 소망스럽다. 평안과 감사를 알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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