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받으며 살아 행복했던 날들
사랑 받으며 살아 행복했던 날들
  • 글/ 박민희 편집장
  • 승인 2015.04.02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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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성도를 찾아서_임명덕 집사(기쁜소식강남교회)

 
봄이다. 바람이 훈훈하다. 공기가 햇볕을 따스할 만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겨우내 차가운 바깥 기운을 향해 문을 꼭꼭 닫았던 나무들이 봄기운에 빗장을 풀고 문들을 열어 꽃망울과 연둣빛 잎들을 일제히 터뜨린다. 인생을 4계절에 비유하자면 예순을 조금 넘은 임명덕 집사는 늦가을에서 초겨울을 지나고 있겠지만, 그의 마음에는 볕이 가득해 따뜻했다. 봄기운에 빗장을 푸는 나무들처럼 그의 마음에 지니고 있는 따스함에 기자의 마음이 열리고 편안했다.

‘예수님이 가져가시면 다 가져가시고, 말면 말지…’
1980년, 약사 임명덕이 운영하던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던 약국에 나이 지긋한 부인이 찾아온다. 그 부인은 이따금 약국에 찾아와 자신이 지나온 신앙의 길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주 유명하고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살았고 감리교회에서 장로로 추대 받았던 자신이 어느 날 어떤 전도사에게서 “금테 두른 성경 끼고 금테 두른 안경 끼고 지옥에 넉넉히 가시겠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자신의 구원 문제를 깊이 생각하다가 나중에 구원받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삶에 지쳐 동네에 있는 교회에 한두 번 나가고 있던 임명덕은 ‘저렇게 신앙생활을 많이 하신 분이 그렇게 구원받았다면 나 같은 사람은 시작도 안 했구나’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나이 지긋한 부인은 박옥수 목사의 장모였다.
 그 후, 임명덕은 약국을 찾아온 당시 서울제일교회의 목사에게서 예수님의 피로 죄가 사해진 이야기를 듣는다. 복음이 마음에 자리잡지는 않았지만 논리적으로 맞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복음을 전한 전도자는 성경을 읽으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날 후 한 달 만에 성경을 다 읽었어요. 내가 들은 이야기가 성경과 같다는 사실을 성경이 가르쳐 주었어요. 그리고 신약 성경 뒤편에서 내가 교회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래서 ‘교회에 가야 하는데…’ 하며 지냈지요. 띄엄띄엄 교회를 나가고 있었는데, 1984년 초에 박옥수 목사님이 서울로 이동해 오셨어요.”
 박옥수 목사 부부가 이동해 오면서 임명덕의 신앙에 변화가 일어난다.
 “하루는 사모님이 수양회를 앞두고 장 보러 간다며 같이 가자고 하셨어요. 약국 문을 닫고 잠시 교회에 간 것이기에 따라갈 수 없었어요. 제가 의아해하며 ‘못 가는데요’ 하자, 사모님이 ‘그러면 그대는 그대 일이나 보셔’ 해요. 30년 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지금도 내 일을 하다 보면 속에서 그 말이 들려요. 하나님이 내 귓바퀴에 걸어 놓으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만 해도 의약 분업이 안 되었던 때라 약국 문을 잠시 닫아 놓고 부인회 등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가능했다.
 “한번은 부인회를 마치고 자매님들이 교제하는 곳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사모님이 ‘자매님, 이리 와 보세요’ 하고 불러요. 멀리서 나를 보고 계셨나 봐요. 사모님이 저에게 ‘예수님이 세상 죄를 보따리로 싸서 지고 가실 때, 그 보따리 한쪽이 불량이라 구멍이 나 임명덕 죄만 쏙 빼고 가져가셨다’고 해요. ‘에이, 사모님. 예수님이 가져가시면 다 가져가시고, 말면 말지…’ 하고 말했어요. 한참 이야기하다 고개를 위로 들어보니, 자매님들이 에스키모 집인 이글루처럼 나를 동그랗게 에워싼 채 사모님 이야기를 함께 듣고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다들 나와 마음이 비슷하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자매님들이 다 굉장히 즐거워하고 유쾌해하는 표정을 보았어요. 교제를 마치고 횡단보도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가 이 사실을 믿거나 말거나 하나님 편에서는 다 해결하고 정리해 놓으셨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내가 믿든지 안 믿든지 사실이니 이건 믿을 수밖에 없다!’고 결론이 났어요. 그 횡단보도 앞에서 구원을 받은 거예요.”
 복음을 접한 지 2년 만에 마음에 복음을 받아들인 임명덕 자매. 그날 나누었던 교제가 그동안 엉켜 있던 마음의 실타래를 풀어 주었던 것이다.

‘그때 힘들길 잘했지! 고생하길 잘했지!’
구원의 문제가 마음에서 풀리니 교회를 향한 마음도 정해졌다. 신기한 것은, 전에 임명덕 자매가 교회에 간다고 하면 ‘잘 갔다 오라’고 하며 아이들을 교회까지 데려다 주고 목사님 양말도 사주던 남편이 갑자기 돌변해 그날부터 핍박하기 시작했다.
 “핍박이 아주 심했어요. 밥 먹다가, 자기 전에, 시도 때도 없이 남편이 핍박했어요. 그런데 마음에 구원이 견고하게 세워지니까 그런 것들이 저를 무너뜨릴 수 없었어요. 오히려 주님을 바라보게 하여 힘을 얻게 했어요.”
 핍박은 임명덕 자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부인 자매들이 교회에 간다고 남편에게 핍박을 받았다.
 “부인회에 가서 간증을 들으면, 사탄이 집마다 찾아가 한 바퀴 돈 거예요. ‘자매는 몇 시에 싸웠어?’ 하고 묻는 게 자연스런 일이었어요. 같이 어려움을 겪고, 같이 믿음으로 싸우고, 같이 해방되었지요. 핍박이 일어난 곳은 한 집뿐이어도 듣는 우리 마음은 늘 함께 흘렀어요. 다 자기 이야기였으니까요. 그렇게 지내다 보니 자매들의 흉을 본다거나 뒤에서 다른 이야기를 한다거나 하는 일이 없었어요. 지금도 그때 함께 지냈던 자매님들과는 앞에서는 무슨 이야기든 하지만 뒤에서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아요. 똑같은 날들을 함께 겪었으니까요.”
 어려움이 없으면 좋을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편하면 마음에 쓸데없는 소리들이 많아진다. 어려움은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여 마음을 강하고 튼튼하게 해준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 우리가 겪었던 어려움들이 우리에게 보약이었지 우리 마음까지 어렵게 했다는 기억은 없어요”라고 말하는 임명덕 집사. 오히려 지난 날들을 돌아보며 ‘그때 힘들길 잘했지! 고생하길 잘했지!’라는 생각이 든다고. 그 어려움들이 신앙을 잡아 주는 좋은 밑거름이 되었기에.

그 솔밭과 하늘과 물과 텐트촌은 환상이었다
공무원 남편, 약국, 아들과 딸, 강남 8학군 아파트. 구원받기 전 다른 사람이 볼 때에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자신은 고통스러웠다는 임명덕 집사. 결혼하고 수 년 동안 ‘이렇게 살려고 결혼했나?’ 하며 다른 삶을 살고 싶어서 가방을 한쪽에 놔두고 풀지 않았다고 한다. 손잡이만 잡으면 집을 떠날 수 있도록 짐을 챙겨 놓은 큰 가방을.
 “구원받고 나서 그 가방을 정리했어요. ‘내가 이 집에서 살아야 되는 거구나’ 하고요. 곧 핍박이 시작되었지만 내가 찾은 ‘마음의 자유’를 핍박과 바꾸고 싶지 않았어요.”
 처음 갔던 수양회가 무척 인상적이었다는 임명덕 집사. 수양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영동 송호솔밭에서 텐트를 치고 지내는데, 그 가운데 자신도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고 한다.
 “처음에 수양회에 가자고 했을 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약국 문을 며칠씩 닫고 어떻게 가?’ 세상이 정해준 삶의 틀을 벗고 수양회에 간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주신 자유가 결국 세상을 찢고 나가게 해주었어요. 아이들과 함께 송호솔밭에 도착했을 때 이 세상을 탈출한 기분이었어요. 탈출하는 내용을 담은 영화처럼요. 솔밭 길을 걷고, 바닥의 모래를 밟고, 물에 들어가고, 텐트에서 지내고, 난생처음 나풀거리는 치마도 입어 보고, 태양 아래 챙모자도 써보고…. 내가 꼭 들에 나온 사슴이나 노루 같았어요. 매일 아침 8시에 나가 밤 11시에 들어오기까지 약국에만 갇혀 있던 나에게 그 솔밭과 하늘과 물과 텐트촌은 환상이었어요. 하나님을 떠나서라도 내 인생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그런데 그곳에서 우주보다 더 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진리 속으로 들어가잖아요. 세상에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시간이었지요. 첫 수양회는 저에게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이었어요.”

 
따스한 목자의 품
교회를 인도한 박옥수 목사 부부와의 사이에 추억이 있으면 이야기해 달라고 하자, 임명덕 집사는 “그걸 다 말하려면 성경보다 두꺼울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구원받고 교회의 은혜를 입어 청년 자매 둘이 약국 일을 돕기 위해 왔어요. 우리 집에서 함께 지냈는데, 말만 자매지 제 눈에는 사도 바울 같아 보였어요. 교회 오가는 데 사용할 한 달 버스 토큰을 사놓고 나머지 월급은 다 헌금하는 걸 보았어요. 저는 따라갈 수 없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둘째 정연이가 남편에게 ‘아빠, 죄 있으면 지옥 간대’ 했어요. 남편이 누가 그랬냐고 물으니까 약국 일을 돕던 이모들이 그랬다고 한 거예요. 그날 밤, 남편은 자매들 짐 보따리를 아파트 담 너머로 다 던져버렸어요. 목사님이 오셔서 자매들을 데리고 가셨지요. 그때 남편을 보고 ‘진짜 예수님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게 되는 거구나’ 했어요. 저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감격스러워서 한 말인데, 갑자기 손이 날아왔어요. 그날부터 싸움이 거칠어졌지요.
 하루는 심하게 싸우고 있는데, 목사님 부부가 찾아오셨어요. 목사님은 남편과 이야기하고, 사모님은 나를 보더니 안쓰러웠는지 와락 끌어안더라고요. 그때 사모님은 내가 어려울 때면 나를 품에 안아줄 만한 마음의 넓이를 가지신 분이라는 걸 알았어요.”
 마음에 구원의 확신이 자리잡은 후 핍박은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을 만큼 임명덕 자매에게 복음과 교회는 소중했다. 그런데 그날은 따스한 목자의 품을 만났다. 어려움을 이겨낼 뿐 아니라, 어려운 날들에도 안겨 평안히 쉴 수 있는 품이었다. 자연히 박옥수 목사 부부와 마음이 가까워졌다.
 “당시 우리 교회에 선교학교가 있었어요. 하루는 마늘장아찌를 많이 담았는데, 선교학생들이 먹는 반찬이 안 좋기에 있는 대로 교회에 가져갔어요. 그런데 교회에 가서 보면, 아침에도 점심에도 저녁에도 마늘장아찌만 먹는 거예요. ‘반찬을 바꿔 가면서 먹지, 왜 저거만 먹나?’ 하고 생각했지요. 반찬이 그것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어요. 목사님이나 사모님은 어려움에 대해 일체 내색하지 않으시니까 저 같은 사람은 누가 이야기해 주지 않으면 어려움 겪는 것을 몰랐어요.”
 한번은 임 자매 친정에서 고구마를 보내주어, 임 자매는 고구마 한 상자를 박옥수 목사 사택에 살짝 가져다 두고 왔다. 당시 박 목사 가족은 도곡동 반지하 집에서 살고 있었다. 제법 여러 날이 지나 박 목사 사택에서 구역 예배를 드릴 차례가 되었다. 임 자매도 참석했는데, 예배를 마치고 고구마가 나왔다.
 “자매들이 고구마를 먹으며 ‘이 고구마 너무 맛있어요’ 하니까, 사모님이 ‘누가 계단 밑에 한 박스 가져다 놓았대?’ 하셔요. 한창 먹을 아이들이 둘이나 있는데, 안 삶아 주고 구역 예배 때 먹으려고 아껴놓은 거예요. 혼자서 ‘그걸 가져다준 게 언젠데…’ 하고 있었지요.”
 비슷한 이야기들이 임명덕 집사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사택에 가면 늘 치약이 끝에 조금만 있었어요. 속이 상해 치약 열 개 들이를 사서 갖다 놓았는데, 다음에 가니까 여전한 거예요. 속으로 ‘아니, 사드렸는데 왜 이렇게 쓰고 계시냐?’ 하고 있는데, 나중에 사역자 모임 때 사모님들에게 나눠주는 거예요. 열 개도 모자라지요. 한번은 초콜릿을 사다 드렸는데, 아이들 안 주고 얼마 후 임신한 어느 사모님이 와서 밥을 먹지 못하고 누워 있으니까 그 초콜릿을 떼 입에 넣어줘요. 그런 삶들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고, 제 마음에 많은 것을 가르쳤어요.”
 마음에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아직 어린 그리스도인의 마음으로 옆에서 그 삶을 지켜보기에는 늘 애가 탔다는 임명덕 집사. 박옥수 목사가 지방 교회 집회에 갈 때 돈을 조금 드리고 싶어서 드렸는데, 나중에 보니 차에 기름이 떨어져 기도하고 있었던 박 목사를 위해 성령이 일으켜준 마음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CCC 회관에서 수양회를 할 때였어요. 눈이 엄청나게 쏟아져 약국 앞을 쓸고 있다가 갑자기 교회에 가고 싶었어요. 지방에 있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라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어느 지방 교회 목회자 부부의 수양회비 8만 원을 챙겨서 교회로 갔어요. 나중에 들으니, 그 돈은 수양회 전단지를 찾는 데 쓰였어요. 전단지 찾을 돈이 없어서 목사님께서 아침 내내 선교학생들과 기도하고, 그래도 돈이 생기지 않아 선교학생들과 온 동네 눈을 다 쓸고 계셨대요. 제가 사모님께 8만 원을 드리자 사모님이 ‘까마귀가 맨날 모자라게 갖다 줘’ 하시는데,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어요. 전단지 찾는 데 10만 원이 필요했던 거예요. 이런 이야기들을 하려면 끝이 없어요.”

‘목사님, 이렇게 쉬운 걸 왜 이제 말씀해 주십니까?’
임명덕 집사의 남편 유근평 형제는 수양회에 참석한 아내를 잡으러 수양회 장소인 솔밭에 왔다가 마음이 열려 수양회에 참석했다. 3년을 참석하며 시간표대로 잘 따라하고 복음반에 참석해 말씀도 들었지만 구원은 받지 않았다. 그런데 건설부 공무원이었던 그가 친척에게 어느 곳의 땅이 개발된다는 이야기를 흘렸고, 그 이야기를 듣고 땅을 산 친척이 땅이 개발되지 않자 사기를 당했다고 고발했다.
 “남편이 어려운 상황에 있었을 때, 위암에 걸려 있던 남편 여동생이 구원을 받았어요. 병에서 나으려고 설악산 대청봉에서 3천 배拜를 했을 만큼 독실한 불교 신자였는데, 죽음을 앞두고 구원받은 거예요. 남편이 나중에 이 사실을 듣고 동생이 변한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어요. 당장 박옥수 목사님을 만나겠다고 했지요. 목사님이 우리 집에 오셔서 거실에서 복음을 전해 남편이 바로 구원을 받았어요. 5분쯤 걸렸어요. 그 긴 세월을 핍박했던 남편이 5분 걸려 구원받고는 ‘목사님, 이렇게 쉬운 걸 진작 말씀해 주시지 왜 이제 말씀해 주십니까?’ 해요. 자신이 듣지 않았던 것은 모르고요. 남편은 신앙이 신실하지는 않았지만 교회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쓰임을 받았어요. 기쁜소식강남교회 건축했을 때나, 예배당 근처의 정말 매입하기 어려운 땅을 샀을 때나…. 주님이 우리 가족을 다 붙잡아 주셨어요.”

 
나의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박옥수 목사가 1990년에 사역지를 대전으로 옮긴 후, 기쁨과 감사 속에서 지내던 임명덕 집사의 삶에 어느 날 큰 어려움이 닥쳐온다. 남편이 보증을 잘못 서서 집과 약국이 하루아침에 다 날아가고 빚더미 위에 앉은 것이다. 절망의 순간에 임 집사는 아이들을 데리고 한밭중앙교회(현 기쁜소식한밭교회)로 박옥수 목사를 찾아간다.
 “목사님이 우리를 제주도 교회 헌당 예배에 데리고 가셨어요. 그때 이장용 선교사님 내외가 재혼해 신혼여행을 갔는데, 주책없이 그분들이 타고 다니던 승합차를 함께 타고 다니며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 돌아서면 내가 오갈 데 없는 사람이란 사실을 잊어버렸어요. 지금은 잘 먹고 잘살고 있지만, 그때 찍은 사진 속 얼굴에 지금은 흉내낼 수 없는 평안이 있어요. 그때 목사님이 우리 두 아이에게 성경을 하나씩 주며, 성경에 ‘나의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시 119:54)라는 말씀을 적어 주셨어요. 그게 우리 집 가훈이 되었어요. 이 말씀이 어려움 속에서 제 마음에 한 줄기 선을 그어 주었어요. 아이들도 그 말씀을 외우고, 결혼한 후에도 그 말씀을 마음에 지니고 있어요.”

“무엇이든 주님의 눈으로 보며 복음을 섬기고 살아요.”
지금은 주님의 은혜로 모든 어려움이 정리되어 평안하게 살고 있다는 임명덕 집사에게 자신이 경험한 인생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손목이 휘어질 정도로 돈을 벌어 보았는데, 돈은 정말 따라갈 게 아니에요. 인생의 고난 중에서 내 영혼의 감독자인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하나님의 종을 만났다는 것, 이보다 더 큰 복을 어찌 얻겠어요? 이 복을 어떻게 세상의 단어로 표현하겠어요?”
마지막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물었다.
 “삶이 무척 어려웠을 때, 다섯 가지 스트레스가 겹치니까 눈이 보이지 않았어요. 희귀 질환으로, 눈은 떴는데 앞은 깜깜한 거예요. 그때 요괴 만화에 나오는 눈알만 수천 개가 보였어요.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빛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사탄의 세계구나!’ 하고 마음에 새겨졌지요. 박옥수 목사님이 기도해 주며 “임 자매, 눈 뜬다” 하셨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근심된 일이 많지요? 나에게도 많은 일들이 있는데, 내가 감당할 수 없어서 주님께 맡기고 살아요. 짐을 주님께 맡겨요. 그리고 눈 뜨면, 무엇이든 임 자매 눈으로 보지 말고 주님의 눈으로 보며 복음을 섬기고 살아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정리해 주었어요.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그것이 제가 살아야 할 이유예요. 그동안 복음을 위해 살았지만 복음만을 위해 살지는 못했어요. 우리 아이들은 나보다 잘사니 걱정할 필요 없고, 이제 마지막으로 복음만을 위해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요.”

지난 일들을 이야기하다 보니 그 시절이 생각난다는 임명덕 집사. 교회 안에서 늘 모자랐지만, 사랑을 받으며 살았기에 지난 날들이 행복했다고 한다. 하나님의 종과 함께 지냈던 삶 자체가 모두 추억이었다고 한다. 모자라게 살았던 날들도 지금 어려움을 겪는 자매들에게 들려주면 상처를 치유해 주는 약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은 약장사란다. 세상에서도 약을 팔고, 교회에서도 약을 팔고. 임명덕 집사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이 감사하다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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