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남태평양 섬나라 사람들을 향해 간다
이제는 남태평양 섬나라 사람들을 향해 간다
  • 글 박민희 편집장
  • 승인 2015.09.04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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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교회를 찾아서_호주 시드니은혜교회

 

 
 

호주 사람들은 대부분 돈을 모으려고 하지 않는다. 돈을 벌면 가족과 함께 여가를 즐기거나 1년에 한 번씩 해외여행을 간다. 삶을 즐기려고 하기에 악착같이 사는 모습도 보기 힘들다. 집을 소유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65세가 되면 정부에서 무주택자에게 집을 주기 때문이다. 돈을 모으지 않기에 어떤 비용이든 한 사람이 다 부담하지 않고 각자 부담한다. 초대받아 간 곳에서 먹은 음식 값도 각자 낸다. 옆 사람에게 음식을 권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호주에서는 친구를 사귀기 쉽지 않다.
울타리를 높이 치고 사는 호주 사람들을 예수님이 사랑하셔서 그들의 친구가 되려고 찾아가셨다. 1998년 5월, 호주 시드니에 기쁜소식선교회의 선교사가 첫 발을 내디뎠다. 지금은 시드니 외에 멜버른•타운스빌•브리즈번에 교회가 세워져 있으며, 시드니은혜교회에는 80여 명의 성도들이 주님을 섬기고 있다. 한인 중심으로 선교가 시작된 시드니은혜교회는 호주 사람들이 하나 둘 구원받아 교회에 더해지고 있으며, 현재는 복음을 들고 피지•파푸아뉴기니•키리바시 등 남태평양의 섬나라 사람들을 찾아가고 있다.

1998년 5월, 호주 시드니에 시드니은혜교회가 개척된다. 주로 한인들이 구원받아 교회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7년 후인 2005년에 제1회 글로벌캠프가 호주에서 개최된다. 한국에서 대학생들과 교사 등 1,700여 명이 호주에서 갖는 캠프였다. 50명 가량의 호주 형제 자매들은 무척 기뻤지만, 엄청난 규모의 캠프를 어떻게 준비하고 뒷받침해야 할지 몰라 부담스럽고 막막했다. 6개월 동안 거의 매일 모여 함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나님께 간구하며 캠프를 준비하는 동안 숙소, 차량, 음식 등 캠프가 아름답게 준비되었다. 캠프가 시작되면서는 마음을 쏟아 봉사했다.
 “뉴질랜드에서 캠프를 도우러 온 자매님들과 함께 음식 준비하는 일을 했어요. 새벽 5시부터 저녁 7시까지 일했는데, 캠프가 열렸던 10일 동안 해를 보지 못했지만 피곤한 줄 몰랐어요. 마냥 기쁘고 감사했어요.”(강미순 자매)
 2008년에 호주에서 다시 글로벌캠프가 개최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그라시아스 합창단이 시드니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한 일이에요. 시드니오페라하우스는 몇 년 전부터 공연 예약이 되어 있어요. 우리가 예약했을 때 순서가 110번째였기에 막막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캠프 기간에 공연할 수 있었어요. 오페라하우스에서 그라시아스 합창단이 노래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감격 그 자체였어요.” (강미순 자매)
 글로벌캠프를 마치고는 지금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을 샀다. 캠프를 뒷받침하느라 물질적인 여력이 없었지만, 형제 자매들이 마음을 모아 무척 부담스러웠던 큰 산을 넘었다. 그런데 그 건물을 예배당으로 사용하려면 용도 변경을 신청해 수리한 후 사용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 일이 쉽게 진행되지 않아 2년의 세월을 보냈다.
 2009년 말경에 양운기 선교사가 시드니은혜교회로 이동하면서 예배당 사용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양 선교사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대하며 ‘이 일이 가지인 우리 일이 아니고 예수님의 일이구나!’ 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예수님이 해결하시겠다는 마음으로 시청에 찾아가 담당자에게 “우리가 건물을 산 지 2년이 넘었는데 사용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 건물을 사용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담당자가 주변 주민들의 민원만 없으면 얼마든지 사용해도 좋다고 도와 주었다. 곧 건물을 예배당으로 꾸미는 공사를 시작했는데, 5개월 만에 민원이 발생해 건물 사용 금지 통보를 받았다.
 “건물을 사용하도록 시청 담당자가 도운 것이었는데, 저는 ‘담당자가 허락했으니 사용해도 된다’는 당연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일로 담당자가 시장님에게 혼났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을 낮추고 다시 담당자와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약속한 날 담당자가 다른 사람을 만나게 해 주었는데, 그분이 건물 사용 허락을 받기까지 우리를 다 도와 주었습니다. 지나고 보면, 어려운 일들이 좋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양운기 선교사)
 예배당 사용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예배당을 꾸미는 공사도 형편적으로는 쉽지 않았다.

 
 

 “교회 형제 자매들이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았지만 목사님 마음에 있는 믿음이 우리 안에 흘러들어와 발을 내딛게 했어요. 나이 많은 호주 자매님이 연금을 자식에게 주지 않고 공사비로 헌금하면서 예배당 공사와 사택 건축 공사가 시작되었어요. 타운스빌에 있는 목수 형제님은 자기 일을 그만두고 시드니로 와서 7개월 동안 힘을 다해 공사를 도왔어요. 호주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이 형제님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어요. 공사 기간에 프랭크 형제님이 무전전도여행을 떠나 같은 교회에 다녔던 친구를 만나 복음을 전했는데, 그분은 벽돌공이었어요. 우리는 벽돌에 앞뒤가 있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쌓았는데, 그분이 와서 벽돌 쌓는 법을 가르쳐 주고, 직접 일도 해 주었어요. 공사하면서 감사한 일들이 참 많았고, 자매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일하는 것이 즐거웠어요.”(김옥경 자매)
 높은 산처럼 여겨졌던 복음의 일들을 하나씩 넘은 시드니은혜교회 성도들. 요즘은 남태평양에 있는 섬들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기도하며 마음을 쏟고 있다. 피지 출신의 애나Ana 자매가 구원받은 후 양운기 선교사와 성도들이 피지에 찾아가 애나 자매의 가족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아 교회가 세워졌으며, 피지에서 하나님의 역사들이 이어지고 있다. 2015년 7월에는 양 선교사 일행이 파푸아뉴기니에 살고 있는 애나 자매의 사촌을 찾아가 그 부인과 친구들이 구원받아 교회가 세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매일 죄를 짓는데, 어떻게 모든 죄가 사해졌다는 사실이 가능하지?
/애나 Ana Vularua 자매

 

나는 6남매 가운데 둘째로, 우리 부모님은 다 교사였다. 엄격한 기독교 집안에서 나도 자연스럽게 기독교인이 되었다. 아버지는 새벽 5시 30분에 가족들을 깨워 기도하게 하셨다. 저녁 6시 30분에도 기도회를 가졌다. 부득이한 이유 없이 빠지면 아버지가 굉장히 화를 내셨다. 그런 삶이 내게는 익숙했다.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려고 애썼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께 빚을 갚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천국에 가고 싶은 만큼 죄의 짐이 무거웠고, 죽음이 굉장히 두려웠다. 결국에는, 교회에 가는 것이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습관처럼 되었다.
2001년에 호주로 공부하러 와서, 피지에 있을 때 TV에서 보며 감탄했던 교회를 비롯해 여러 교회에 찾아가 보았지만 마음의 공허함을 달래줄 교회는 없었다. 설교 내용은 어느 교회나 비슷했다. 결국 교회를 나가지 않기로 했다.
2004년 어느 가을 날, 길에서 단정하게 옷을 입은 아주머니와 아이들을 보고 마음이 열려, 바로 앞에 있던 그분이 다니던 교회에 나가기로 했다. 다음 주일에 교회에 가니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어색했지만, 설교 말씀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며칠 후 복음을 듣고는 ‘구원받는 것이 이렇게 쉬울 수 있는가?’ 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우리가 의인이 아니라고 증명해 보이려고 애썼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하지만 이 말씀이 내 마음을 강하게 때렸다. 교회에서 걸어나오면서 당황스러웠다. ‘내가 매일 죄를 짓는데, 모든 죄가 사해졌다는 사실이 어떻게 가능하지?’ 그러나 사실이었다. 성경은 내가 예수님의 피로 의롭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었다.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오랜 날들을 방황하며 그토록 찾았던 그 보물임을 느낄 수 있었다. 형제 자매님들의 사랑도 내 마음을 활짝 열어 주었다. 나는 마침내 구원을 받았다. 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구하던 삶이 끝났다. 나 같은 사람을 진리가 있는 교회로 인도해 복음을 듣게 하신 하나님이 감사했다.
교회에 남태평양의 섬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없어 외로울 때가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복음이 있는 교회를 떠날 수는 없기에, 다만 이 진리가 우리 가족들에게 전해지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감사하게도, 교회에서 우리 가족들이 구원받는 것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양운기 목사님의 마음을 인도해 주셔서 목사님이 피지에 계신 우리 부모님에게 찾아가 복음을 전하셨다. 하나님께서 부모님의 마음을 열어 주셔서 부모님도 나처럼 진리의 복음을 확신하셨다. 우리 남매들도 복음을 받아들였다. 복음이 피지 사람들에게 점점 전해져 드디어 2013년에 피지에 우리 교회가 개척되었다. 오랫동안 꿈꾸었던 나의 소망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 저는 어쩌면 좋아요…
/이미경 자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교회에 있는 동안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고, 놀랍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도 여러 번 보았다. 특별히 2005년과 2008년에 호주에서 열렸던 글로벌캠프는 나의 모든 것을 쏟으며 내 한계를 넘어 지냈던, 크고도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새 예배당을 살 때 나로서는 도저히 드릴 수 없는 물질을 하나님께서 헌금할 수 있게도 하셨다. 예배당을 꾸미는 공사를 할 때에도 힘들었지만 나 같은 자를 써주시는 것이 감사해 기쁨으로 열심히 일할 수 있었다. 우리 선교회에서 무전전도여행을 다녀온 분들의 간증이 쏟아질 때, 교회의 인도로 나도 한 자매님과 함께 울릉공으로 일주일 동안 무전전도여행을 다녀왔다. 하루 종일 복음을 전하고 자주 함께 기도하며 우리 마음이 복음으로 뜨거웠으며, 과분한 잠자리와 음식을 매일 풍성하게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손길에 감사했다.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무전전도여행, 그 순간 순간들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덧 나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 복음을 위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자 한번씩 교회를 향하여 섭섭한 마음이 올라오고, 이해되지 않는 일을 만나면 마음에서 부딪힘이 일어났다.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그런 마음으로 빠져들었다.
수 년 동안 교회에서 들었던 나는 악하다는 말씀. 생각에서는 ‘그렇지. 나는 항상 악하지…’ 하고 받아들이는데, 삶에서는 늘 내가 옳은 사람이었다. 한번은 교회에서 내가 오랫동안 해온 일을 다른 사람이 맡자 다 싫고 분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너무 괴로워서 종이에 내 마음을 빠짐없이 적어 내려갔다. 다 적고 나서 종이를 보니,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없었다. 육신의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많은 말씀을 들었는데, 어떻게 마음에 말씀이 하나도 없을 수 있지? 내가 말씀을 안 듣는 사람이구나…’ 비로소 마음에서 하나님을 부르기 시작했다. “하나님, 하나님, 저는 어쩌면 좋아요…?”
목사님을 찾아가자 오랫동안 기다리고 계셨던 것처럼, 잘못된 내 마음을 성경 말씀으로 세밀하게 가르쳐 주셨다. 악한 나를 믿고 살았던 날들이 보였다. 복음의 일들을 하며 악한 나를 좋은 사람으로 세운 것이 보였다. 사탄에게 제대로 속아 지냈던 것이다. 너무 부끄러웠고, 할 말이 없었다. 그때 목사님이 성경을 펴서 한 구절을 보여 주셨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롬 5:10) 놀라운 말씀이었다. 나는 하나님의 원수였는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화목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나님 앞에서 거리낌이 사라지고, 자유와 평안이 찾아왔다. 내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님이 이루신 일 안에서 축복을 누리는 새로운 신앙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를 믿는 길에서 돌이켜 말씀을 믿는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감사하다.

넌 왜 항상 너에게 초점을 맞춰?
/이지혜 자매

 

2005년에 호주에 와서 영주권을 얻기 위해 요리를 배웠다. 호주에서 삶을 새로 시작했지만 그 생활도 곤고해 교회를 다녔다. 그 후 구원받은 자매님을 만나 2006년에 죄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생각에 기쁘고 행복했다. 믿음으로 영주권도 받고, 10년 넘게 아파서 걷기 힘들었던 다리도 ‘아프지만 나았다’는 박옥수 목사님을 간증을 듣고 그대로 따라해 나았다. 결혼하고 남편과 몹시 싸우며 탈출구가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목사님이 전해 주신 성경 말씀대로 우리 부부가 변하는 일도 경험했다.
3년 전, ‘스시’와 커피를 파는 카페를 시작했다. 얼마 전, 남편이 다른 일을 시작해 일할 사람을 구해 꼭 필요한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으면 이분에게 일이 생겨서 일을 못 할 수도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속에서 한 음성이 들렸다. ‘넌 왜 항상 안 된다고 생각해?’ 은혜를 입어야 한다는 마음이 겸손한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돕지 않으실지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의 표현이었다. 다시 한 음성이 들렸다. ‘넌 왜 항상 너에게 초점을 맞춰? 하나님은 악한 너를 보시지 않아.’ 깜짝 놀랐다. 갑자기 8년 전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면서 들었던 박옥수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생각났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향하여 선글라스를 쓰고 계십니다. 그 선글라스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악해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보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보십니다.”
나를 향하고 있던 마음이 말씀 편으로 향했다. 돌아보니,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나에게 반응하며 산 것이 부정한 삶이었다. 항상 말씀을 들었지만, 사탄은 교묘하게 생각을 넣어 내 행위를 보게 했다. 이젠 하나님을 바라본다.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나?’ 생각하면 소망스럽다.

리브가가 준비한 것으로 야곱이 복을 받은 것처럼
/인나 Inna 자매

 

나는 안식일교회에서 자랐다. 하루는 신앙에 마음을 쏟아 살던 아버지가 술에 취해 오셔서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너무 힘들고, 이젠 지겹다.” 하셨다. 그 후로 우리는 안식일교회에 가지 않았다. 뉴질랜드로 이사해 결혼했지만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아 이혼하면서 예수님을 찾기 시작했다. 착하게 살려고 했지만 죄가 늘 마음을 짓눌렀다. 그때 김서욱 자매님을 만나 복음을 들었는데, 처음 듣는 말씀이라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쉽게도 김 자매님이 한국에 잠시 다녀와야 했는데, 가기 전에 창세기 27장 내용이 담긴 전도지를 주었다. 야곱이 리브가가 준비한 것으로 복을 받은 것처럼 내 모습과 상관없이 예수님이 내 죄를 해결하신 내용이 마음에 들어왔다. 눈물이 흐리고, 나를 짓누르던 죄가 떠나가고 평안해졌다.

언제나 나를 인도하시는, 나의 목자 하나님
/켄 Ken Chung 형제

 

나는 인도 캘커타에 이주해 4대째 살고 있는 중국인 가정에서 태어나 2002년에 시드니로 유학을 왔다. 그리고 그 해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
나는 2002년에 시드니대학을 졸업하고, 2009년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를 마치기 이틀 전에 딸이 태어나 행복했지만, 우리 가족의 미래는 불투명했다. 교수가 되고자 50개 대학에 원서를 냈지만 두 곳에서만 면접을 볼 수 있었고, 그마저 통과하지 못했다. 국제적으로 경제 위기가 찾아와 대학에서도 직원을 줄이던 때여서 좋은 일자리를 얻기 힘들었다.
사람들은 나를 박사라고 불렀지만, 직장 없는 백수에 불과했다. 내가 나를 보아도 불쌍하고,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여기저기 원서를 내지만 불합격 통보 편지만 점점 쌓여 갔다. ‘아내와 아이를 어떻게 먹여살리지…?’ 어떤 일이라도 하고 싶었다. 청소부, 청원경찰, 슈퍼마켓 점원…. 시켜만 주면 너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에서 시간 강사 일을 하면서 근근히 살았다. 방학이 되면 강의가 없기에 영세민을 돕는 정부 기관에 가서 도움을 받아야 했다. 희망이 사라졌다. 그때, 2008년 호주 글로벌캠프에 참석했던 한국의 어느 장로님이 해 주신 이야기가 떠올랐다. “형제님이 38년 된 병자가 되면 바로 그때 누군가가 와서 형제님을 도와 주실 겁니다.”
2009년 11월에, 나를 지도했던 교수님께서 ‘울릉공대학에 교수 자리가 났다’고 이메일을 보내 주셨다. 모교인 시드니대학에도 교수 자리가 나 두 곳 다 지원서를 제출했다. 2010년, 하나님은 나에게 울릉공대학의 교수 자리를 주셨다. 사막에 샘물이 흐른 것처럼 뛸 듯이 기뻤다. 신기하게도, 나를 면접한 분들이 다 나를 아는 사람들과 친한 분들이었다. 한 교수님은 나를 지도한 교수님의 제자였고, 한 교수님은 대학에서 내 아내를 지도한 교수님이었다. 하나님이 퍼즐 조각을 맞추시듯 맞추어 놓으신 것이다. 그 일은 내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을 남겼다.
시드니대학 교수 임용에는 떨어졌다. 다른 지원자들이 하버드대학이나 옥스퍼드대학 등 좋은 대학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2011년 어느 날, 시드니대학에서 전화가 왔다. 내가 2009년에 지원서를 낸 학과에서 아직 교수를 뽑고 있다며, 원한다면 이전 지원서로 다시 접수해 주겠다고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뛰어난 학력을 가진 지원자들이 이상하게도 면접이나 마지막 절차에서 떨어졌던 것이다. 얼마 후, ‘심사위원들 앞에서 지금까지 연구해 온 결과를 1시간 동안 발표하고, 1시간은 면접을 갖는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심사위원은 6명으로, 모두 찬성해야 교수로 임용되는 것이었다.
2월에 있을 발표를 마음을 다 쏟아 준비했다. 발표 전날, 목사님에게 이야기를 듣고 싶어 전화를 드렸다. 양 목사님은 시편 23편의,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말씀을 들려주셨다.
“형제님에게는 부족함이 없으니 형제님이 원하지 마세요. 시드니대학 교수직을 얻고 싶다는 마음을 버리면 목자이신 하나님이 형제님을 복된 곳으로 이끌어 가세요.”
내 마음에 있는 원함, 욕망이 보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삶이 보였다. ‘지금까지 내 삶의 한 조각 조각을 맞추신 분이 누구인가? 주님 아니신가!’ 마음에 선을 그을 수 있었고, 푹 잘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발표장에 가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시드니대학 관계자였다.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며, 심사위원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때가 9시 10분이었는데, 9시에 발표를 시작하고 10시에 면접을 시작한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나는 10시에 발표를 시작하는 것으로 잘못 읽었던 것이다. 긴장, 충격 등 상상할 수 없는 감정들이 몸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꼼꼼한 내가 어떻게 이런 실수를…!! 일생일대의 기회를 이렇게 망치다니…!!’
9시 50분에 시드니대학에 도착해 심사위원들에게 이메일을 잘못 읽었다고 사과드리자, 발표는 이미 늦었으니 우선 면접을 진행하자고 했다. 면접을 앞두고 시편 23편 말씀을 새겼다. 마음에서 다시 원함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면접은 잘 진행되었다. 면접 후, 학과장이 발표 시간을 놓친 큰 실수를 언급하고 내가 발표한 논문 수가 적다고 했다. 이어서 “그러나 우리는 당신을 채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축하합니다!” 하고 말했다. 믿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직장을 주셨어!’ 하고 속으로 소리쳤다. 시편 23편 말씀이 떠올랐다. 지금 나는 내가 몸담고 있는 학과의 학부장이 되었고, 연구 성과로 정부와 대학에서 여러 차례 연구 자금도 받았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목자로 나를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통가, 쿡제도, 바누아투, 솔로몬제도 사람들도…
/양운기 선교사
2004년 10월 28일에 선교사로 호주에 파송 받았다. 첫 번째 사역지는 호주 북쪽의 작은 도시 ‘타운스빌’이었다.
 선교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것은 언어였다. 나이 마흔에 영어를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한번은 전도하고 싶어 주변에 있는 쇼핑센터에 갔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노트에 영어로 두 문장을 적었다.
 “마음에 죄가 있습니까?”
 “당신은 지옥에 갑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덩치가 큰 인도네시아 남자가 벤치에 앉아 있기에 다가가서 다짜고짜 “마음에 죄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인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예스”라고 했다. 나는 바로 “당신은 지옥에 갑니다.”라고 했다. 외우지도 못해 노트에 적은 걸 보고 말했다. 그러자 그 사람이 굉장히 흥분해 손을 들었다가 주변의 사람들 때문에 때리지는 못하고 손을 떨면서 내렸다. 

 

 하루는 쇼핑센터에서 설거지용 세제를 샀는데, 집에 와서 보니 화장실 청소용 세제였다. 너무 답답하고 막막해, 2005년 글로벌캠프 때 박옥수 목사님을 뵙고 이런 상황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목사님이 “화장실 세제도 필요해.”라고 하셨다. 이어서 “타운스빌에 영어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복음 전하는 사람은 없어.”라고 하셨다. 복음을 전하는 일 앞에서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 나와 다른 목사님의 마음. 이후로 자주 그 마음이 생각났다.
 그 후 ‘제프’라는 분이 구원받아 가족과 함께 교회에 나왔다. 하루는 그의 부인이 남편과 싸운 후 나를 찾아와 울면서 마음을 쏟아냈다. 나는 그 이야기를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도 성경을 펴서 잠깐 말씀을 전했는데, 고맙다고 하고 돌아가서는 다시 교회에 오지 않았다. 그 집에 찾아가자 제프 형제가 ‘당신이 영어를 못 해서 우리 가족이 교회에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마음에서 많이 울었다. 영어를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주 새벽이 되도록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마음에 갈등도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 보였기에,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호주 백인들이 구원받아 교회에 나왔지만, 한국 형제 자매들과는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마음이 어려울 때도 많았다. 한번은 어느 형제가 우리 가족을 초대해 그와 함께 야외에 나갔다. 음식을 조금 준비하기는 했지만 당연히 형제가 음식을 준비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형제는 자신이 준비한 음식을 자신만 먹고 우리에게는 권하지도 않았다. 그런 일들에 처음에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고 인도해 복되게 하셨다.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교회를 세우셨다.
 시드니로 옮겨온 후, 하루는 애나 자매님이 고향 피지에 가서 말씀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피지를 방문해 자매님의 부모님에게 복음을 전하고, 어느 교회에 초청 받아 그곳에서 말씀을 전하기로 했다. 굉장히 부담스러워서 박옥수 목사님께 전화를 드려 “목사님, 통역 없이 말씀을 전하라고 합니다.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하고 말씀드렸다. 목사님이 “알겠네. 기도하겠네.”라고 하셨다. 목사님의 기도를 의지하며 복음을 전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 말할 수 없이 기쁘고 감사했다.
 그 후로 애나 자매님의 가족들이 계속 연결돼 30명 가량의 성도들이 모였고, 그분들이 부탁해 피지에 교회가 세워졌다. 작년 11월에 가진 IT캠프에는 700명 가량의 피지 청소년들이 참석해서 복음을 들었다.
 지난 여름에 가졌던 한국 월드문화캠프 전에는 파푸아뉴기니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곳에서 구원받은 사람들 또한 교회를 세워 달라고 부탁했다. 조만간 키리바시에도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한다. 키리바시 청소년부 장관님이 한국 월드문화캠프에 참석해 구원받고 기뻐하며 행복해 했다. 통가, 쿡제도, 바누아투, 솔로몬제도 사람들 또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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