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산
팔복산
  • 관리자
  • 승인 2015.12.03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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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순례(35회 마지막회)

 

갈릴리 바다는 어느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 이름과 모양이 달라진다. 디베랴(티베리아) 쪽에서 바라보면 디베랴 바다가 되고, 게네사렛(기노싸르)에서 바라보면 게네사렛 호수가 된다.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갈릴리 호수를 ‘얌 키네렛’이라 부르는데, 우리말로 긴네롯 바다가 된다. 예수님은 디베랴에서 쿠르시(거라사인의 지방)로, 벳새다에서 게네사렛으로, 게네사렛에서 바다 중심으로, 갈릴리 해안 길을 여기저기 두루두루 다니시며, 때로는 배 위에 앉아 복음을 전하셨다.

 

갈릴리, 예수님의 그림자
갈릴리 바다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을 갈릴리 지역이라 한다. 갈릴리 호수의 크기는 남북으로 21킬로미터, 동서로 14킬로미터다. 호수 가까이에는 가버나움과 벳새다, 조금 멀리에는 가나, 나사렛, 갈릴리 게데스 등의 크고 작은 고대 도시나 유적들이 있다.
 갈릴리 바다를 배경으로 예수님이 일하신 장소들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예수님이 일 년간 사셨으며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던 가버나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벳새다, 군대 귀신 들린 자를 만나신 쿠르시,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던 게네사렛 등,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예수님이 능력을 베푸신 기적의 현장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 바로 갈릴리 바다 지역이다.
 예루살렘이 종교에 찌든 유대인의 그림자고, 가이사랴가 당시 타락한 로마 귀족들의 그림자라면, 갈릴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순수한 시골 청년의 모습을 하신 예수님의 그림자라 할 수 있겠다.

산상보훈과 팔복산 지역
팔복산은 히브리 말로 ‘하르 하 오셰르’ 즉, 복의 산을 의미한다. 우리말로 팔복산이라 불리는 작은 언덕 산은 예수님이 산에 오르시고 무리 중에서 제자들을 불러 산상보훈을 말씀하신 곳으로 순례자들에게 알려져 왔다. 이를 근거로 로마카톨릭에서 그곳에 성당을 지어 ‘팔복산 교회’라고 이름 붙였으며, 지금은 산상보훈을 기념하는 유명한 방문지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팔복산 교회가 예수님이 산상보훈을 말씀하신 곳이라고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2천 년 전에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말씀을 전하셨기 때문이다. 현재 팔복산 교회 옆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란 나지막한 언덕이 하나 있는데, 전형적인 갈릴리 지역의 낮은 언덕 산 모양을 하고 있다. 이곳은 옛날 유대인들이 절기나 행사가 있을 때마다 모여 랍비 등 말씀 맡은 자들의 설교를 듣는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나는 가끔 팔복산 교회 옆, 오래 전에 유대인들이 모임을 가졌던 곳까지 걸어서 내려가 보곤 한다. 아무것도 없는 빈 언덕이지만 아래서 혹은 위에서 보면 마치 극장식 공연장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공연도 하고 박옥수 목사님을 초청해 집회를 열어도 문제가 없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시대부터 유대인들은 절기나 행사 때마다 가버나움에 있는 대회당을 중심으로 모여 말씀을 들었다. 당시 갈릴리 지역은 물론이고 갈릴리 바다 너머의 작은 마을에서도 가버나움 쪽으로 건너와 절기를 지키고 행사에 함께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러나 가버나움 대회당이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크지 않아 주요 절기 외의 크고 작은 행사는 가버나움에서 가까운 언덕 산을 이용해 모였다고 한다. 당시 유대인들의 집단 모임 장소로 어부들의 집이 모여 있던 벳새다 지역의 빈들과 이곳 팔복산 지역의 언덕 산이 주로 사용되었다고 전한다.
 예수님이 산상보훈을 어디서 전하셨든지, 팔복산 지역은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기 위해 서신 곳임이 틀림없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모인 장소면 어디든지 가셔서 말씀을 전하셨고,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던 벳새다와 팔복산 언덕은 족히 수천 명은 모일 수 있는 넓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도로 계획 때문에 옛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다 복원한다면 여자들과 어린아이까지 합쳐서 1만여 명 이상 충분히 앉을 수 있는 공간이다.
 현재 갈릴리 바다에서 벗어나 디베랴에서 차를 타고 약 5분정도 나사렛 방향으로 올라가면 ‘키르네이 힛틴’이라는 작은 언덕 산이 나온다. 그곳 또한 몇몇 소수 학자들이 진짜 팔복산이라고 주장하는 곳으로, 정상에 서면 갈릴리 바다가 훤히 보이고 넓은 들판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는 곳이다. 하지만 옛 대회당이 있었던 가버나움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어서 팔복산 지역보다 가능성은 떨어져 보인다. 그러나 갈릴리 바다 전 지역에서 말씀을 전하신 예수님께서 이곳에서도 말씀을 전하시고 사람들이 모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마이크도 없이 며칠씩 말씀을 전하셨다
팔복산이나 벳새다에 가면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예수님이 계실 당시에는 마이크 시스템도 없었는데 어떻게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말씀이 바람을 타고 제일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결정적인 말씀을 전하실 때마다 집중했을 것이고, 말씀이 마음에 충격이 되면 무리들이 술렁였을 것이고, 술렁이면 다시 집중하기 위해 중간 중간에서 조용히 하라고 제스처를 취하는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당시 고대 시리아어인 아람어가 섞인 히브리어를 사용하셨는데 예수님의 목소리가 여타 기독교 방송에서 나오는 것처럼 근엄하게 천천히 말하는 할아버지의 굵은 목소리 같지는 않을 것이라 여겨진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오르사 앉으셨을 때 제자들이 나왔다고 기록되었다. 분명한 것은 제자들은 물론 수많은 무리가 함께 말씀을 들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최근 들어 한국 기성교회 주일 예배 말씀 시간이 점점 짧아진다고 한다. 반면 2천 년 전 예수님은 열악한 조건 속에서 식사도 못 하시고 몇 시간뿐 아니라 며칠씩 말씀하셨던 것으로 성경에 나타나고 있다.

 

내가 살고 싶은 갈릴리 지역에서 수양회를 하고 싶다
갈릴리 지역은 내 마음에 특별하게 다가오는 곳이다. 하나님이 내게 이스라엘에서 살고 싶은 곳을 선택하라 하신다면 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갈릴리 바다를 끼고 펼쳐진 도시 티베리아를 선택할 것이다. 예수님이 다니셨던 곳을 다니며 전도하고, 목사님을 초청해 갈릴리에서 수양회도 하고 싶다.
 한국에서 형제 자매님들이 성지순례를 올 때마다 수년간 우리와 동행하는 유대인 친구가 있다. 그는 유대교인도 아니고 기독교인도 아닌데, 우리와 함께 갈릴리 바다를 다니는 동안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 들으며 큰 호감이 생겼다고 한다.
 언제부턴가 순례팀이 갈릴리를 여행할 때 나는 주일학교 찬송 가운데 ‘예수님의 사랑 신기하고 놀라워’를 부르기 시작했다. 갈릴리 바다와 무척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선택한 찬송인데, 부르면 부를수록 매료된다. 특히 갈릴리 지역에서 부르면 더욱 그러하다. 유대인 친구는 이 노래가 중독성이 있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며 하모니카로 연습해서 순례팀들에게 한 번씩 들려주었다. 솜씨는 어설프지만 갈릴리 지역의 평온한 모습과 멜로디가 잘 어우러져 우리 마음에 아름다운 선율을 전해주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문득 그가 곧 구원받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나님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롬11:26)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복의 개념을 뒤집은 여덟 가지 복
예수님은 팔복산에서 여덟 가지 복을 명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그리고 의를 위해 핍박 받는 자라고 하셨다. 어떻게 가난한데 복을 받고, 어떻게 애통하는데 복이 되며, 어떻게 핍박을 받는데 복이 되는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 사함의 복음을 주셔서 복의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 엎으셨다. 그 가운데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에 대한 부분이 특별히 마음에 크게 와 닿았다. 나는 핍박이 너무 싫었고, 복음을 전하는 종과 우리 교회를 비방하는 이들의 소리가 너무 싫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박옥수 목사님이 하신 말씀을 들었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와 간음 중에 잡힌 여자가 “주여, 없나이다.”라고 한 말씀을 바탕으로 전하신 이야기였다. 우리를 대적하는 이들이 있는 것 같아도 하나님에게는 없는 것과 같고,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우리 눈에는 보여도 하나님의 눈에 없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없이 하신다’는 말씀을 들으며 마음이 하나님 편으로 다시 옮겨졌다. 우리가 의를 위해 받는 핍박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고 복福이기에 교회와 함께 ‘하하하’ 기쁘게 웃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예수님은 우리 눈에 안 좋아 보이는 모든 형편과 어려운 핍박이 바로 하나님이 일하실 조건이고, 복음의 능력이 나타날 조건이라고 말씀하셨다. 진정한 복은 세상과 육신에 있지 않음을 가르쳐 주셨다.

 

 

연재를 마치며
지난 3년간 매달 <기쁜소식>에 성지순례를 기고했다. 막상 글을 써보니 원고 를 작성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글을 쓰는 이들이 얼마나 심사숙고하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성지순례 장소와 위치, 지명의 유래, 역사적 배경, 그리고 성경의 기록 등을 기본 자료로 하여 글을 쓰는데, 인터넷 정보로만 쓸 수 없어서 직접 향토 연구가를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구전되어 온 이야기들도 많아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굉장히 어렵기도 했다. 좋은 사진을 확보하지 못한 부분은 아주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이 와야 글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전까지는 도무지 글을 정리할 수 없어 많이 기도했다. 그러면 설교 말씀을 듣다가 혹은 성경을 읽다가 혹은 간증하다가 혹은 잠을 자다가 혹은 길을 가다가 하나님이 어떤 마음을 넣어주셨다. 그러면 그때부터 마치 손에 기계를 단 듯 원고를 쓰곤 했다. 3천 군데가 넘는 성지 가운데 35개 곳에 대한 글을 썼다. 더 많은 곳을 쓰지 못한 것이 무척 아쉽다.
 구원받은 형제 자매님들과 성지를 함께 다니는 동안 마음에 새겨진 많은 장면들이 떠오른다. 눈을 감으면 게네사렛 호수의 파도소리와 엔게디 정상의 다윗 폭포의 물소리가 ‘와’ 하고 마음에 들려오는 듯하다. 골고다 언덕과 예수님의 빈 무덤, 그리고 통곡의 벽, 감람산에서 바라본 예루살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목사님들이 나귀를 타고 내려오며 뒤에서 “호산나!” 하던 모습, 사해와 쿰란, 다윗과 골리앗의 엘라 골짜기, 가이사랴의 원형극장에서 성도들이 불러준 노랫소리, 베들레헴 지경의 목자들의 들판, 나사렛의 따뜻하지만 연약한 모습,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신 유대 광야의 요단강, 그리고 아사셀의 협곡, 베데스다와 빌라도의 법정, 므깃도 골짜기와 간음하다 잡힌 여자가 섰던 성전산, 맑은 헐몬산의 물줄기, 그리고 힌놈의 골짜기, 갈멜산,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 벧엘, 사마리아, 겟세마네 등등이 내 마음에 떠올라 메아리치는 듯하다.
 어느날 스승되신 목사님께서 삶에 지쳐 어려워하는 나에게 “장 형제, 메마른 골짜기를 걸어가도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재미가 있네”라고 하셨는데, 유대광야를 볼 때마다 그 말씀이 떠오른다.
하지만 내 마음에 최고의 성지는 기록된 말씀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예수님이 계셨던 성지지만 지금은 안 계시고 오직 기록된 말씀과 말씀을 믿는 의인들의 마음속에서만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예루살렘에서 11년간 살았다. 예수님은 서른 셋에 이곳을 떠나셨고 나는 서른셋에 이곳에 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성지순례를 기고하는 동안 다른 나라들보다 볼품없고 초라하고 어설픈 이스라엘 곳곳에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님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어서 참 감사했다. 보잘것없던 광야와 들판이 예수님과 연결되면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것 같이 이 세상에서 보잘것없는 우리 인생이 예수님을 만나면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이 말할 수 없이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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