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소중하게 여긴 슈바이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긴 슈바이처
  • 하권옥 선생님
  • 승인 2016.05.23 17: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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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 특강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운동을 잘하고 인기가 많아도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없어요. 그래서 내일의 리더가 될 키즈마인드 독자들에게 밝고 건강한 마음, 넓고 겸비한 마음을 가진 리더의 마음자세를 알려주려고 해요. 12회에 걸쳐 연재되는 리더십특강에 귀 기울여주세요.

 

밀림의 성자, 세계의 위인
여러분도 ‘대한민국의 슈바이처’, ‘청년 슈바이처’ 등… 의학 분야에서 뛰어난 봉사정신을 발휘한 의사들에게 붙여주는 별칭을 들어본 적 있을 것입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환경이 열악한 아프리카 가봉에서 원주민들과 함께 지내며 의료 선교를 펼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평생 약 한 번 먹기 힘든 원주민들에게 의료 혜택을 열어주었던 슈바이처의 리더십을 살펴보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는 아이
슈바이처는 1875년에 독일과 프랑스의 접경지역인 알자스에서 태어나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한번은 슈바이처가 어릴 때 친구와 크게 다투었습니다. 그때 슈바이처에게 일방적으로 진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너처럼 매주 두 번씩 고기스프를 먹는다면 너만큼 힘이 세겠지!”
그 말을 듣고 슈바이처는 자신의 주변에는 어렵게 사는 친구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잘 먹고 잘 입는 자신이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슈바이처의 부모님은 아들에게 좋은 음식을 먹이고, 좋은 코트를 입히고 싶어 했지만, 슈바이처는 친구들이 입는 것과 같은 허름한 코트를 입고 다녔을 정도였습니다.

 


모두가 반대하는 무모한 도전
슈바이처가 어렸을 때 음악에 관심이 많아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를 배웠는데, 음악회를 열 정도로 뛰어난 연주 실력을 가졌다고 합니다. 또 목사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30세 때, 아프리카에서 각종 질병으로 죽어가는 원주민들에 대한 소식을 잡지에서 보았습니다. 슈바이처는 자신이 아프리카에 가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뒤늦게 의학을 공부한 것입니다.
8년간의 의학공부를 마치고 아프리카 가봉으로 떠날 준비를 하는 슈바이처를 보고 친구들이 하나같이 말렸습니다.
“이보게, 알베르트! 자네의 뜻은 충분히 이해하네. 하지만 자네 혼자 가서 그들을 돕는다고 달라질 건 없어. 어리석은 짓일세.”
“알베르트, 그 결심은 자네 일생에서 가장 큰 실수가 될 걸세.”
친구들은 여러 말로 슈바이처의 마음을 돌리려고 했지만 그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생명은 거룩하고 존중받아야 하네. 아프리카의 흑인들이라고 해서 병에 걸려 죽어도 된다는 말인가?”
슈바이처의 부모도 아들이 아프리카에 가겠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지만, 슈바이처가 품은 뜻을 알고는 반대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보다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을 먼저
슈바이처가 38세 되던 해, 아내 헬레네와 함께 검은 대륙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배 안에서 한 군의관이 “아프리카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태양입니다. 대낮에는 물론 아침과 저녁에도 모자를 쓰지 않으면 일사병에 걸려 쓰러집니다.” 하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아프리카의 환경이 매우 열악하고 질병과 전염병도 많아서 매우 위험한 땅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슈바이처는 개의치 않고 1913년에 가봉의 한 마을에 짐을 풀었습니다.
백인 의사가 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멀리서부터 아픈 사람들 수십 명이 매일같이 찾아왔습니다. 병원 건물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서 슈바이처는 집 앞에 닭장을 임시 진료실로 꾸며 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습니다. 슈바이처는 하루 종일 나병환자, 말라리아 환자, 결핵환자, 풍토병 환자들에 둘러싸여 진료해 주었습니다.
그 뒤로 슈바이처는 세계대전을 거치며 유럽의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아프리카에 대해 강연을 하고 연주회를 열어 모금활동을 했습니다. 슈바이처가 다시 가봉으로 가려고 할 때, 가족과 친구들은 이제 편히 살기를 바라며 슈바이처를 말렸습니다. 그러나 슈바이처는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내버려둘 수 없다며 가봉으로 돌아갔고, 원주민들의 큰 환영을 받았습니다. 슈바이처는 모금한 돈으로 병원을 세우고 의료시설을 늘려 더 많은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러한 업적이 알려지고, 슈바이처는 1953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노벨상의 수상 소식을 전해들은 슈바이처는 무척 기뻐했습니다.
“노벨상의 상금을 받으면 나병환자들을 위한 마을을 만들 수 있으니 기쁘군.”
노벨상이라는 명예보다도 아프리카 환자들을 더 많이 치료해 줄 수 있게 된 것이 기뻤던 것입니다.

 

왜 3등칸을 타고 가십니까?
슈바이처가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기자들이 슈바이처를 취재하기 위해 기차에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1등칸과 2등칸을 살펴보았지만 슈바이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3등칸에서 사람들을 진찰하고 있는 슈바이처를 발견했습니다.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박사님, 왜 3등칸을 타고 가십니까?”
그러자 슈바이처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이 기차에는 4등칸이 없더군요.”
기자들이 어리둥절해하자, 슈바이처가 다시 말했습니다.
“저는 편안한 곳을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다닙니다. 1등칸이나 2등칸에 있는 사람들은 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성경 잠언에 보면,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러한 슈바이처의 겸손한 마음은 사람들에게 더욱 존경을 받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편안한 삶을 버리고 고난의 길로
슈바이처는 나이가 든 뒤에 고국에서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높은 지위와 편안한 생활을 버리고 아프리카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었습니다. 성경에도 이와 같은 인물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큰 지도자 모세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히브리인으로, 원래 바로 왕의 명령에 따라 아들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강물에 던져져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왕의 공주를 만나 궁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애굽의 좋은 음식과 옷, 많은 학식을 배우며 왕자처럼 살던 모세는 어느 날, 자신의 동족인 히브리인이 핍박을 받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애굽인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 일로 인해 광야로 도망가서 오랫동안 양치기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성경에서는 모세를 보고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브리서 11:24∼26)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왕궁에서 애굽 공주의 양자가 되어 편안히 지낼 수 있었지만, 그것을 거절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받고 멸시받는 것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크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상 주실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는 삶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을 위한 길을 버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고난을 받고자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자신이 잘 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짓밟기도 하고 큰 재산과 명예를 얻기 위해 나쁜 일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결국 자신도 망하게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남을 위해 살았던 사람은 고생하고 손해 보는 것 같지만, 행복을 느끼고 가치 있는 삶을 살며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여러분이 슈바이처의 마음을 배워서 다른 사람을 위해 살 때 여러분도 더 많은 사랑을 받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슈바이처가 남긴 명언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을 새기며 진정한 리더십을 배우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삶의 중요한 순간에 남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것으로 말미암아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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