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와 안수
세례와 안수
  • 관리자
  • 승인 2017.05.2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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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이야기5

어느 유대인의 눈에 비친 마태복음 3장
몇 해 전, 한 유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예수님에게 마음을 열고 있는 유대인으로 내게 이렇게 물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면 그 말은 곧 그에게 죄가 넘어갔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죄가 언제 어떻게 그에게 넘어갔는가? 율법에서는 제사장이 하나님의 모든 희생을 위한 염소나 양들의 머리에 안수하여 죄를 넘기는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면 그 부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나는 친구의 질문을 받고 속으로 웃었다. 그리고 기분이 무척 좋았다. 이스라엘에 살면서 즐거운 일 가운데 하나는 바로 나 같은 이방인이 우리 죄가 어떻게 해결됐는지 죄 사함의 복음을 분명하게 안다는 사실이다. 나는 마태복음 3장을 펴서 우리 죄가 어떻게 예수님에게 넘어갔는지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친구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잠시 후 “이 질문에 답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다. 그런데 누가 이것을 네게 가르쳐 주었느냐?”라고 다시 물었다.
 나는 박옥수 목사님의 설교집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 중에 여섯 번째 이야기 ‘영원한 제사’ 편을 소개했다. 친구는 “이 책의 저자가 혹시 유대인이 아니냐?”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며 이방인이 어떻게 유대의 속죄제사를 세밀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 놀라워했다.

세례는 언제 어떻게 행해지나?
세례는 유대인의 정결 의식으로, 히브리말로 ‘트빌라’라고 하며, 온몸을 물이나 어떤 곳에 푹 잠그는 신앙적인 행위를 말한다. 세례는 유아 세례를 비롯하여 그 종류가 아주 많은데, 그 가운데에는 세례를 베푸는 자가 누구냐에 따라, 선지자가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경우와 자기 스스로 자신에게 베푸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할례와 같은 율법적인 결례를 행한 직후, 여자들은 불경기를 지난 후, 남자들은 잠자리에서 설정한 후, 부정한 물건에 접촉이 되었을 경우, 어떤 특정한 일에서 정결 의식을 요구할 경우, 특별한 임무에 대한 위임 의식을 행할 경우 등에 세례 의식을 행했다. 또한, 영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스스로 마음을 겸비하거나 정결한 마음을 가져야 할 때 행했다. 선지자나 랍비 혹은 제사장 반열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세례를 행하려면 반드시 자신이 먼저 정결해야 하기 때문에 먼저 자신에게 세례를 행했다. 성경 필사를 맡은 유대인들은 성경을 필사하기 전에 항상 세례를 행했다. 필사를 하다가 한 글자라도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기록해야 하는데 그때도 자신을 스스로 정결케 하는 의식을 다시 행했다. 나아만 장군이 선지자 엘리사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가서 혼자 일곱 번 몸을 잠근 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종의 세례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세례를 행할 때에는 반드시 머리까지 온몸이 물에 잠기도록 해야 하며, 자기가 자신에게 행하는 세례를 할 때에도 대부분 물속에 온몸이 잠기도록 들어가 앉아야 한다. 선지자가 위임을 위한 정결 의식으로 세례를 베풀 때에는 온몸이 물에 잠기기 전에 선지자가 세례 받을 사람의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하고 그의 머리를 눌러 물속에 온몸이 들어가도록 한다. 기독교인들이 침례를 베풀 때에는 보통 물속에서 몸을 뒤로 젖혀서 눕히는 경우가 많지만, 유대인들은 물속에 그냥 앉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 때에도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인도로 물속에 그대로 앉아 머리까지 완전히 몸을 잠갔다. 그때의 세례는 예수님이 스스로 행한 세례가 아니라 세례 요한이 주도하여 예수님에게 베푼 세례였기에 세례 요한의 손이 예수님의 머리 위에 있었다.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세례의 영적인 의미
세례에서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고, 몸을 물에 잠그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마음 전부를 결정하는 영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닷길을 지나는 것 역시 영적으로 그들이 애굽에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롭게 하나님 앞에 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행해진 세례는 죄 사함을 받고 난 후에 교회에서 세움을 입은 전도자들을 통해 행해지는데, 우리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사되고,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으로 새롭고 의롭게 된 것을 기념하는 의식이다. 이때 전도자들이 세례를 베풀기 전 머리에 손을 얹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을 부르며 안수하는 과정을 거친다.

세례가 행해진 장소
유대인들은 요단강 같은 자연적인 장소에서 세례 의식을 행하기도 하고 인공적인 장소를 만들어 행하기도 했다. 유대인들이 인공적으로 만든 세례 장소를 ‘미크베’라고 부른다. ‘미크베’는 물이 귀했던 당시 이스라엘 전역에 물을 비축해 두는 장소로서, 여러 사람이 세례를 받을 수 있는 대형 미크베부터 한 사람이 들어가는 개인용 미크베까지 그 모양과 크기가 다양하다.
 예수님 시대의 유적지 가운데 많은 곳에서 크고 작은 미크베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정결케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보여 주고 있다. 심지어 헤롯 왕의 ‘겨울 궁전’이라고 불리는 ‘마사다 요새’에서도 미크베가 발견되었다. 아기 예수를 찾아 죽이려 했던 헤롯 1세는 사해 근처 유대광야에 삼층 구조의 화려한 궁전을 건설하고 그 안에 한증막 사우나 시설을 만들어 로마의 귀빈들과 따뜻한 겨울을 즐기며 보냈고, 사우나실 바로 앞에 작은 미크베가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쾌락을 좇는 곳과 자신을 정결케 하는 미크베가 같이 존재하고 있었다. 미크베는 계단이 있는 작은 수영장 같은 모양이고, 지금도 많은 종교인들이 정결 의식을 행할 때 현대식 미크베를 이용하여 세례를 행하고 있다.

세례 요한이 베푼 회개의 세례
세례 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 태어나 장성한 후 유대광야 옆 베다니 맞은 편 요단강에서 메시아 예수님을 기다리며 살았다. 마태복음을 읽으며 무척 재미있었던 부분은, 당시 수많은 백성들, 특히 죄 때문에 고민하고 고통했던 사람들이 전부 다 세례 요한에게 나아갔다는 사실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헤롯 성전이 있었다. 성전에는 제사장들이 있었기 때문에 죄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은 모두 성전으로 가서 죄를 해결했다. 성전이 있고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죄의 문제를 들고 성전으로 가지 않고 유대광야에 있는 세례 요한에게로 가서 죄를 자복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기록된 예언을 따라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가 먼저 와서 메시아를 맞을 준비를 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선지자가 바로 세례 요한이라고 인식했다는 것이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 4:5)

세례 요한이 왜 먼저 와야 하는가?
당시 세례 요한에 대한 소문이 시골 장터에서부터 헤롯궁까지 널리 퍼지며 세례 요한은 바로 주의 첩경을 평탄케 할 선지자로 주목받았다. 세례 요한은 유대광야 인근 요단강에서 죄를 자복한 사람들에게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는 당장 죄 사함을 주는 세례가 아니라 죄 사함을 받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율법을 어긴 죄인임을 고백하고 더 이상 율법을 지킬 수 없어 여호와께서 구원을 베풀지 않으면 절대 의로워질 수 없는 사람인 것을 마음에 인정하게 하는 세례였다. 세례 요한이 베푼 세례는 말씀 그대로 ‘회개의 세례’로서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돌이키게 하고 정하게 하는 세례였던 것이다. 즉 레위기에 나오는 속죄제사에서 속죄 희생을 끌고 오기 전 바로 ‘그 범한 죄의 깨우침을 받거든’이라는 구절에 해당하는 과정이라 하겠다.
 세례 요한 앞에 나아온 사람들은 모두 율법의 행위로 도저히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메시아가 오셔서 구원을 베풀어주셔야만 살 수 있는 죄인임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이제 메시아를 만나 구원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정하는 의식이었다. 약속하신 구원자를 만나기 전에 마음을 준비케 하는 의미의 세례였던 것이다.

세례 요한이 필요한 이유
사람들 가운데에는 마음이 낮고 비어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죄 사함을 받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자신이 뭔가 해보려는 율법의 행위에 매여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종교적인 예루살렘 사람들의 경우 더욱 그러했다. 율법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메시아가 와도 자신이 율법으로 의를 이룰 수 없는 죄인임을 마음에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메시아를 만나기 전 반드시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 앞에 돌이키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바리새인들 중에도 세례 요한을 정탐할 겸 유대광야까지 가서 그에게 세례를 받아 보려 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 세례 요한은 그들을 가리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강하게 말하며 마음은 바꾸지 않고 가만히 들어온 그들을 책망했다. 만약 마음이 낮고 비어 있는 상태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쉽고 하나님이 그 마음에 역사하기 쉽지만, 율법에 매인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것은 종교적 행위에 젖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마음 중심에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는 메시아를 맞을 준비를 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케 하는 일을 함으로써 기록된 말씀 그대로 주의 첩경을 평탄케 하는 선지자로 세움을 입었던 것이다.

안수按手
안수는 유대인의 삶에서 뺄 수 없는 축복의 수단으로 오랜 세월 이어져 왔다. 한번은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데 한 유대인이 내 머리에 손을 얹고 히브리말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 사람의 손을 내 머리에서 떼어내려 하자 그는 더 힘을 주어 안수하며 기도했다. 내가 머리를 피하자 이 사람이 기도를 멈추고 “내게 15달러만 내라. 그럼 내가 축복해 줄게.”라고 했다. 그 후로도 가끔 통곡의 벽에서 유대 종교인들에게 돈을 주고 안수기도로 축복을 받는 외국인들을 보았다.
 유대인들은 길을 가다가 친한 사람을 만나면 서로 마주보고 앉아 마치 축문을 외듯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말로 서로가 서로를 축복한다. 심한 사람은 이야기하는 도중에 상대방의 머리에 안수하고 주절주절 축복하기도 한다. 그처럼 안수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불러 주는 하나의 도구로 쓰인다. 안수하는 이유는 안수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과 능력이 넘어가기 때문이다.
 창세기에서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할 때도 정확히 그들의 머리에 안수하여 축복했다. 벳세다의 빈 들에서 있었던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의 현장에서도 예수님이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는데, 여기서 축사는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떡을 손에 쥐고 하늘을 향해 들어올린 후 유대인들이 하는 축복을 입으로 옮기셨다. 이때 예수님의 손이 빵에 닿아 있는데, 이러한 축사 역시 안수의 형태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죄를 넘기려면 반드시 안수해야 한다

‘안수하다’는 히브리 말로 상대의 머리에 손을 얹어 그 손을 의지하여 무엇인가를 다른 쪽으로 넘긴다는 뜻이다. 안수는 레위기에 나오는 속죄제사에서 반드시 행해져야 하는 필수 조건이다. 왜냐하면 레위기 1장 4절에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고 못을 박았기 때문이다. 죄를 안수하여 넘기지 않고 희생을 잡으면 그 희생이 아무리 깨끗하고 정해도 그 제사는 무효가 된다. 죄를 안수하여 넘기고 희생을 잡아야 그 피를 통해 속죄, 즉 죄의 값이 지불되는 것이다. 속죄제사에서 모든 과정이 필수적이지만 희생에 안수하고, 희생을 잡고, 속죄되는 이 과정은 필수 중의 필수 조건이다. 제사장은 번제소에서 희생을 잡기 전에 반드시 안수를 통하여 희생의 머리에 손을 얹어야 한다. 만약 손을 얹지 않고 말로만 한다면, 다시 말해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과정이 없이 무엇인가를 처리한다면 모든 희생의 제사가 무효가 되고 피 흘려 죽은 희생의 존재감 자체가 없어진다.
 이런 점 때문에 오랜 세월 일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표현된 부분을 문제 삼아 왔다. “예수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면 제사장의 안수를 통해 죄를 넘겨받은 적이 있어야 하는데, 제사장이 그의 손을 그 머리에 얹은 적이 있는가?”라고 추궁하는 것이다. 그 답을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에서는 (217~218쪽 참조) 레위기의 속죄제사와 마태복음 3장을 통해 안수 여부 문제를 정확히 풀었다.
 인간이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머리에 손을 얹은 사실은 2천 년 전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마태복음 3장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이가 다른 이에게 세례를 행할 때에는 그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사람의 몸을 물속으로 그대로 앉히는데, 바로 마태복음 3장 16절에서 예수님의 머리에 요한의 손이 정확하게 놓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부분 외에는 “제사장이 언제 예수님에게 안수했는가?”라는 질문에 해명할 길이 없다.

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인가?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더 이상 죄 문제로 자기에게 나아와 자복할 필요가 없음을 알린다. 그는 예수님을 소개할 때 왜 하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했는가? 예수님을 소개할 수 있는 많은 말들이 있다. “보라, 메시아로다! 보라, 하나님의 아들이로다! 보라, 유대인의 왕이로다!” 등. 그러나 그는 유독 유대광야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란 단어를 선택했다. 여기에는 비밀이 있다. 즉, 죄가 정확히 예수님에게 안수되어 넘어갔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모든 죄가 저에게 넘어갔으니 이제는 더 이상 죄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저분에게 있다.”라는 의미가 되고,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저분에게로 죄가 안수되어 넘어갔다는 것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의 규례상 죄가 안수되어 희생에게 넘어가면 더 이상 자기에게 죄나 죄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결론이 난다. 이제 남은 것은 죄를 넘겨받은 어린양이 피 흘려 죽는 일만 남은 것이다. 영원계에 사는 하나님 편에서는 이미 창세 전에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님에게 다 넘어갔다. 그렇지만 시간계에 사는 인간에게 그 사실을 증명해 보여 주셔야 하기에 약속대로 반드시 예수님이 오셔야 하고, 그 전에 세례 요한이 와야 했던 것이다. 이 시대에 하나님이 이렇게 자세한 복음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은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얻으시려는 특별한 뜻을 우리에게 보이신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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