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도 봄이 왔다
내 인생에도 봄이 왔다
  • 김범수(기쁜소식무창포교회)
  • 승인 2019.04.08 11: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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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소식 2019년 4월호
보배와 질그릇

 무릇 범凡 자에 물 수水, 범수. ‘평범한 물 그릇’이란 뜻인 내 이름은 외삼촌께서 평범하게 살라고 지어주신 이름이다. 하지만 내 인생은 평범하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은 자주 싸우셨고, 결국 내가 여덟 살 때 이혼하셔서 나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나는 그때까지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다. 신이 있다고 생각될 때는 신을 원망하곤 했다.
여덟 살 때 간질이 시작됐다. 간질은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전에는 구구단도 19단까지 외우고 책도 잘 읽는 똑똑한 아이였는데, 병을 심하게 앓으면서 1 더하기 1도 모르는 바보가 되었다. 한번은 수업 도중에 발작을 일으켜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그 모습에 놀란 친구들은 나를 이상하게 보기 시작했고, 짓궂은 아이들은 나를 둘러싸고는 때리고 다시 기절해 보라며 아주 심한 장난을 쳤다. 귤껍질을 짜서 내 눈에 뿌린다든지, 내가 다른 곳을 보는 틈을 타서 글루건으로 내 팔을 지지기도 하고, 내 입에 개구리를 넣기도 했다.
큰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았고, 다행히 열세 살쯤에 간질은 완치되었다. 하지만 친구들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는 더 곪아갔다. 하나님이 많이 원망스러웠다. 다른 사람들은 정상적으로 사는데 나는 다른 삶을 사는 것이 싫었고, 이런 나를 키우시는 어머니 또한 정말 싫었다. 중학교 3학년 때에는 자살하겠다며 부엌에서 칼을 쥐고 외할머니와 어머니와 같이 죽자고 했다가 어머니의 제압으로 그치고 말았지만, 내 마음에서는 상처들이 무척깊게 나 있었다.

죄 사함은 확신했지만
어머니는 친구 아들이 대안학교에 가서 많이 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를 그 학교에 보내고 싶어하셨다. 어머니와 나는 그 학교가 어떤지 알고 싶어서 내가 열여섯 살 때 기쁜소식대천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2014년 3월 1일 링컨하우스대구스쿨에 입학했다. 그리고 5월에 대구에서 가진, 박옥수 목사님이 강사인 성경세미나에 참석해 구원받았다. 복음을 전해준 김영욱 목사님이 이사야 1장 18절 말씀을 전해주셨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이 말씀을 들으며 내 죄가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어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죄 사함을 받았지만 여전히 누군가가 나를 괴롭힐까봐 초조하고 두려워서 상황에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할 때가 많았다. 친구를 사귀는 것도 어려웠고, 내 속에서 올라오는 생각을 이기지 못해 계속 끌려갔다. ‘범수야. 애들이 너를 많이 간섭해서 힘들지? 그럼 죽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건물 3층에서 내 몸을 던져보려는 생각도 하고 아무도 모르는 어두운 곳에 숨기도 하며, 나 자신을 계속 학대했다. 나도 나 자신을 감당할 수 없었다. 죄 사함은 확신했지만 내 생각을 따라 보고 느끼는 것을 믿고 살 뿐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도우신다는 믿음을 갖지 못했다.

저기에 가면 저렇게 행복해질 수 있나?
대학에 들어가서도 내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나의 부족함과 약함을 감추기 위해서 항상 겉으로는 밝은 척, 환한 척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학교 게시판에 붙어 있던 굿뉴스코 해외봉사단 포스터를 보았다. 교회에서 해외봉사단 활동에 대해서 듣고 봐서 알고 있었는데, 그날은 유독 포스터 속의 현지인과 봉사단원의 환한 미소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복하게 웃고 있을까? 저기에 가면 나도 저렇게 행복해질 수 있나? 나도 행복하고 싶다. 사랑받고 싶다.’ 내 안에 전에 없던 마음이 생겼다. 그것이 하나님이 준비해 주신 길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져 갔고, 얼마 뒤 나는 짐바브웨로 갔다.

‘나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구나.’
짐바브웨에서도 잘 적응하지 못했다. 내가 문제였지만 알지 못하고 형편만 탓했다. 짐바브웨에는 모두 여섯 명의 단기선교사들이 있었는데, 나를 제외한 다섯 명은 각각 자신을 나타내는 수식어를 가지고 있었다. 댄싱머신, 만능스포츠맨, 포토그래퍼 등 자신의 특기를 살려 아카데미와 여러 행사를 담당했다. 어벤져스 같은 그들과 달리 나는 눈에 띄지도 않는 엑스트라였다. 뭐 하나 내세울 게 없는 내 모습을 보고 있으면 열등감만 느껴졌다. 다른 단기선교사들은 제대로 활동하고 있는데 나만 어정쩡하게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혼자서 겉돌았다. 하나님이 왜 나를 거기에 두셨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날도 우리는 식사 후 가위바위보로 설거지 당번을 정했다. 나는 가위바위보도 잘 못했기에 내가 질 것을 예상했고, 결국 평소처럼 내가 져서 현지 친구인 타코와 같이 당번이 되었다. 나는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타코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타코는 내 마음이 어떤지 듣고 싶어했다. 나는 그저 영어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설거지를 하며 내 마음을 처음으로 타코에게 표현했다.
“타코, 나는 진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여기 와서도 그렇지만, 내 인생은 늘 이랬어. 여덟 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그때부터 간질도 생겼어. 그것 때문에 항상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어떻게 해야 내가 변할 수 있을까?”
내 이야기를 듣고는 타코가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범수 형, 내가 보기엔 형은 행복할 조건이 참 많은 거 같아. 나는 두 살 때 엄마와 아빠가 이혼하셔서 동생 세 명을 나 혼자 돌보고 있어. 그리고 자동차가 내 발을 밟고 지나가서 새끼발가락도 잃었어. 형, 그런데 나는 참 감사한 게, 부모님이 이혼하셨지만 두 분이 아직 건강하시고, 난 새끼발가락이 없어도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잖아. 형도 나처럼 생각을 바꿔 봐. 형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여도 많은 사람이 형에게 신경을 써주고 친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어.”
나는 설거지를 하다 말고 타코를 끌어안고 울었다. 항상 내가 제일 불행하다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더 큰 아픔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감사하다고 말하는 타코를 보며 내가 부끄러웠다. ‘나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구나.’ 타코의 따뜻한 위로가 짐바브웨를 향해 닫혔던 내 마음을 열어 주었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내 인생의 퍼즐이 하나하나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에게 닥쳐온 어려운 상황들은 사탄이 나를 이끌었기 때문에 생긴 일도 있지만 하나님이 준비해 주신 상황들도 많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나님이 어려움을 통해 나의 인생길을 이끌어 주신다고 생각하니 무척 기뻤다. 하나님이 타코를 통해 당신의 마음을 나에게 말씀하신다는 마음이 들었고, 그 마음과 가까워지고 싶어서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사고하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내 생활이 긍정적으로 변해갔다.

 

 

너처럼 상처받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 거야
그 후로 궂은일을 도맡아서 하고, 남들보다 부족하기에 더 노력했다. 그런데 노력에 비해 결과는 좋지 않았다. 나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계속 실수만 하니 점점 의기소침해졌다. ‘하나님, 제 생각대로 하지 않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여겨 했는데, 왜 주님의 뜻이 나랑은 다른 거죠?’ 주님의 뜻이라고 여겨 긍정적으로 사고하며 행했지만 마음대로 잘 되지 않자 다시 그런 내가 싫어서 울분을 터뜨렸다.
그때 사모님이 나에게 다가오셨다. 나는 청소할 때에도 사모님에게 대들고 내 마음대로 했기 때문에 사모님이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내 생각일 뿐이었다.
“사모님, 저는 왜 이렇게 못난 걸까요? 뭐 하나 잘하는 것이 없고, 열심히 할수록 실수만 늘어요. 어려서부터 그랬어요. 부모님 이혼에, 간질에, 따돌림에.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왜 저만 이렇게 어려워야 해요?”
“그래, 많이 힘들었겠다. 그런데 범수야, 너 한국의 농부들이 가을에 보리씨를 뿌리는 이유를 아니? 가을에 씨를 뿌리면 보리 싹이 춥고 힘든 겨울을 지나야만 하잖아. 그래도 가을에 씨를 뿌려야 그 가을에 수확한 양식이 바닥날 즈음에 보리를 추수해서 귀한 양식이 될 수 있어. 그래서 보리 싹이 자라기 힘들 걸 알면서도 씨를 뿌리는 거야. 범수야, 나는 네가 겪는 어려움들이 너를 겨울을 지난 보리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고 생각해. 네가 그런 사람이 되면 너처럼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 거야.”
보리에게 겨울은 인고의 시간이지만 동시에 보리를 강하게 만든다고 하신 사모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내 인생은 끝까지 겨울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짐바브웨에서 따뜻한 사랑을 만났다. 그 사랑을 느꼈을 때 나의 길었던 겨울은 비로소 희망 가득한 봄이 되었다.


‘죄송해요, 사랑해요’
아무것도 못 한다고 생각했던 내가 입을 열고 짐바브웨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후 마인드 강연을 하면서 내가 발견한 희망과 행복을 사람들에게 전해주었다. 내가 하는 강연을 듣고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는 것을 볼 때 무척 행복했다.
마인드 강연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 예배에 초청받아 가서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간증하고, 무전 전도여행을 가서도 간증하며 복음을 전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의 마음이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았다. 나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바뀐다는 것이 이렇게 경이롭고 대단하다는 것임을 전에는 알지 못했다.
어머니의 생신 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내 마음을 다 표현했다. 어머니에게 ‘죄송해요,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그런 말을 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무척 감사했다. 어머니는 외동아들인 나를 잘 키우기 위해 사셨는데, 나는 그 마음을 모른 채 어머니를 무시하고 내 생각대로 살았다. 어머니의 마음을 비로소 알게 되자 그동안의 어색함은 사라지고 어머니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귀국한 후에도 어머니에게 자주 전화해서 내 마음을 이야기하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내 모습을 보시고 어머니도 놀라워하신다.

내 인생의 멘토 짐바브웨
굿뉴스코 귀국발표회에서 나의 이야기가 트루스토리 연극으로 공연되었다. 나는 트루스토리에서 무대를 세팅하고 옮기는 스태프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공연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무대 뒤에서 사람들이 연극을 보며 웃는 소리를 들으며 내 이야기가 나와 같은 어려움을 가진 이들에게 소망이 되고 더 나아가서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길 바랐다.
짐바브웨는 내 인생의 멘토다. 내가 알지 못했던 내 모습을 알게 해주었고, 사람들의 마음을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 누구보다 어머니와 마음으로 만나게 해주어 무척 감사하다. 한국에서 느끼지 못한 많은 사랑과 행복을 가져다준 짐바브웨. 언젠가 그곳으로 돌아가 예전의 나처럼 겨울에 머물러 있는 보리들에게 봄을 찾아주고 싶다. 내 인생의 계절을 겨울에서 봄으로 이끌어주신 선교사님과 사모님,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어머니 김현숙 자매 이야기
우리에게 일어난 큰 은혜에 감사하며...

“엄마 나 마음 바꿨어요”
아들을 키우며 어려운 일들이 너무 많았다. 아들은 어릴 때에는 천재적인 기질이 있었지만 아프면서 기억을 다 잃어버렸다. 그때부터 친구들에게 장애인 취급을 당하고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다. 범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했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에 불만과 불평이 많았고, 나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에 아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아들과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몰랐고, 믿음도 없었다.
그런 아들이 해외봉사를 가서 많이 변했다. 아들은 부족함 없이 자랐지만 항상 우울했는데, 감사를 배우고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했다. 한날은 내 생일에 전화가 왔다. “엄마, 나 마음 바꿨어요.”라고 하며 죄송하고 사랑한다고 하는데,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들여 이야기하는 것이 놀랍기만 했다. 짐바브웨에서도 어려움이 많았지만 잘 마치고 올 수 있어서 감사했다.

“엄마, 기도해 주세요”
얼마 뒤 귀국발표회를 준비하러 간다고 할 때 나는 아들에게 스태프로 일해보라고 했다. 귀국발표회 무대가 이루어지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수고하는지 알면 좋겠다고 하자, 범수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체험담 발표나 트루스토리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우리 집안 이야기가 알려지는 것이 싫어서 그건 하지 말라고 했지만, 범수는 오히려 “엄마, 기도해 주세요.”라고 하는 게 아닌가. 전에는 이런 말을 하지도 않았고 항상 내 존재를 배제했는데, 이제는 엄마의 기도가 자신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또한 놀라운 변화 가운데 하나다. 이제는 나와 이야기하고 싶어 하고,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어 한다.
범수의 기도대로 범수 이야기가 트루스토리가 되었고, 내가 무엇을 한 것도 아닌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다. 귀국발표회를 본 다른 가족들이 감동을 받고 많이 우셨다. 어떤 분은 범수가 어렵게 크고 내가 많이 고생한 줄 몰랐다며 나와 범수가 잘 되기를 기도하겠다고 했다. 범수가 성장하는 과정을 다 지켜본 내 친구도 범수가 많이 달라졌고 장하다고 했다. 자신의 부족한 이야기를 보여주기 쉽지 않고 부끄럽고 열등감을 느꼈다면 절대 할 수 없었을 텐데, 그런 것을 다 뛰어넘었다는 것이 무척 감사했다. 범수가 자신의 아픔과 연약함을 이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범수와 나의 삶 속에 있었던 어려움을 하나님이 백 배 천 배로 갚아주셨다.

범수보다 내가 더 큰 은혜를 입은 것이 분명하다
전에 나는 교회와 마음을 함께하지 않았다. 그저 아들 문제 때문에 교회에 있는 학교를 활용했고, 교회는 범수를 교육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은 좋은 학교를 만들어 주고 해외봉사를 경험하게 해준 교회가 감사하다. 교회가 이제는 도구가 아닌 우리 삶을 이끌어주는 곳이 되었다. 귀국발표회를 통해 내 신앙생활에도 큰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그동안 나는 내 개인적인 삶에 관심이 더 컸는데 이제는 범수와 함께 교회와 같이하고 싶은 그림을 그리곤 한다. IYF의 활동에도 관심이 가고, 월드캠프에도 한번 참석하고 싶다. 귀국발표회를 통해 범수보다도 내가 더 큰 은혜를 입은 것이 분명하다.
몇 달 전에는 그라시아스합창단의 북미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 준비를 도우러 캐나다에 다녀왔다. 13일 동안 머물며 봉사했다. 병이 날 정도로 힘들었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뒤에서 수고하는 줄 몰랐다. 수고도 했지만 은혜를 많이 입었다. 범수의 고등학교 친구들이 거기에 봉사하러 와 있어서 그들의 활동도 보고, 그곳에서 만난 남학생이 이번에 트루스토리 공연을 하는 것을 보며 범수와 통하는 것이 생겨서 좋았다.
무엇보다, 박옥수 목사님이 하시는 일과 교회의 일에 대한 내 생각이 바뀌었다. 박 목사님과 교회가 아주 위대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그냥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을 하는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단기선교를 갔다 오면 ‘으레 귀국발표회를 하는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상에 이렇게 큰 영향력을 끼치는 선교단체가 있을까!’라는 마음이 들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어려운 일을 하려 하지 않는데, 우리 교회 학생들은 해외에 나가서 민간외교관의 역할뿐 아니라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어려운 일도 기꺼이 봉사하는 사람이 되니, 이것이 위대한 일이 아니고 무엇일까!

아들이 아프리카에 갈 때 나도 아들을 도와서 일하고 싶다
범수는 다시 아프리카에 가고 싶다고 한다. 아프리카 전역을 돌려면 영어와 불어를 알아야 한다며 불문학을 부전공하겠다고 한다. 짐바브웨에 가기 전에는 생각지 못한 일들이다. 아프리카가 아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하게 한다. 아들 덕분에 나도 영어를 완벽하게 하고 싶은 도전할 일이 생겼다. 아들이 아프리카에 갈 때 나도 아들을 도와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다.
나는 범수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을 자주 보며 살았다. 그래서 범수가 숨을 쉬면서 걸어다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런데 범수는 그런 내 마음과 달리 항상 우울하게 사는 것이 가슴이 너무 아프고 속상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연약할 때 하나님이 강하게 역사하셨다고 하신 것처럼 이제 범수를 통해서도 하나님이 강하게 역사하실 것이 소망스럽다. 하나님이 범수를 어떻게 키우실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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