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새로운 영의 인도를 가로막는 영적 옳음
[설교] 새로운 영의 인도를 가로막는 영적 옳음
  • 김재홍 (기쁜소식인천교회 목사)
  • 승인 2020.09.03 09: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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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호 기쁜소식
옳음에서 벗어나 영의 세계로 (16편)

 

새로운 영의 인도 앞에서 다 버려져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선악의 기준에 비추어보아 악하기 때문에 버리는 것은 신앙의 초보 단계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인간의 생각이 항상 악할 뿐이다’는 말씀대로 자신의 의나 선이 다 버려지고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여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육신적인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적인 것뿐만 아니라 영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새로운 영의 인도 앞에서는 다 버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데, 우리는 그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눈앞에 있는 것만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축구를 예로 들면, 감독이 선수를 교체할 때 어떤 선수가 잘못하기 때문에 교체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선수들이 잘하고 있어도, 현재 선수 구성으로 상대 전술을 깰 수 없을 때 선수를 바꾸어서 다른 작전을 구사하기 위해 선수를 교체합니다. 이런 경우 어떤 선수가 아무리 잘하고 있어도 교체합니다. 지금은 은퇴한 박지성 선수가 유명했던 것은 중요한 경기에서 진가를 발휘했기 때문입니다. 최강의 축구팀들은 작은 차이에 의해 승패가 결정되는데, 그 역할을 박지성 선수가 할 때가 많았습니다. 박지성 선수는 공수전환이 빠르고, 공격과 수비에 적극 가담하며 경기 내내 많이 뛰어주어 팀을 더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고 영으로 말미암아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에 후사가 없어서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에게 마음을 두고 있을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날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 아브라함이 사라의 종 하갈을 취해서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 ‘사라가 낳은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믿음으로 이삭을 얻었습니다.
이삭은 분명히 약속으로 말미암아 얻은 아들이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아들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이삭은 약속과 믿음으로 얻은 아들인데 어떻게 버려?’ 하며 자신이 아들을 잡고 있으면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랫동안 놋뱀에게 분향했던 것처럼, 아브라함이 마음에서 이삭을 붙들고 있으면 새로운 영의 인도를 받지 못하고 그 인도를 가로막는 일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는 히브리서 11장에서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얻은 이삭이라도 번제로 드려야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으로, 아브라함의 생애가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일생을 따라서 그의 믿음의 삶을 조목조목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첫 번째 믿음은, 하나님이 그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신 데에서 나타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어느 곳으로 가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야 할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때 그가 ‘믿음으로’ 행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어서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믿음으로 아들을 얻었습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히 11:11~12)
아브라함의 믿음의 삶이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또 다른 믿음의 삶을 나타내고 싶으셨습니다. 이 믿음은 언제 나타나고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하나님은 이 믿음의 삶을 나타내기 위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19)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삶은, 믿음의 시작부터 끝까지 믿음을 완성하려고 하나님이 그려놓으신 그림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고, 자신과 사라의 몸이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하나님이 아들을 주실 것을 믿어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자손이 생겼습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얻은 이삭,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주신 이삭을 하나님이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만약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러 가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리고자 하신 믿음의 큰 그림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마지막 믿음의 세계가 나타나려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려야 합니다. 이삭이 약속으로 말미암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 앞에 버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버려져야 하는 영적인 옳음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나타내는 배우와 같고, 혹은 감독의 전술을 펼쳐내는 축구선수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생애의 마지막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믿음을 나타내고 싶으셨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이삭이 영이냐, 육이냐?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느냐, 인간으로 말미암았느냐?’ 등을 따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려면 하나님의 뜻 앞에서 영적인 옳음까지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앞에서는 아무리 영적이고 귀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버려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히브리서 11장 17~19절 말씀처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것’을 믿는 부활의 믿음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다른 것은 다 드려도 이삭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어떻게 이삭을 번제로 드려?’ 하고 끝까지 붙들고 있었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고, 어떻게 그가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더 깊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영적이고 귀한 것이라 할지라도 전부 내려놓고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 보면 ‘내가 한 일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것, 옳고 그름을 구분해서 옳으면 버리지 못하며 그로 인해 마음에서 어려워하는 것이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자신의 선과 의를 버리지 못하고 그것을 내세운다면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이겠습니까? 인간의 의는 다 악한 것이어서 그것들을 버려야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면서 영적인 옳음도 버려야 하나님께 계속 쓰임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계속 나타내는 사람이 됩니다. 영적인 옳음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선악의 기준으로 보아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생애 속에 큰 믿음의 세계를 만들고 싶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아브라함이 잡고 있는 영적인 것들이 버려져야 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귀한 것이요, 하나님의 역사라 할지라도 버려야 했습니다. 그것을 쥐고 있으면 새로운 영의 인도를 받는 삶의 발목을 잡기 때문입니다. 옛 것을 놓지 못하면 새로운 영의 인도를 받지 못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큰 믿음의 삶의 그림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성도 개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고 계획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앞에서 자신이 가진 옳음을 내려놓아야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우리를 통해서 마음껏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해 선악의 기준에서 생긴 옳음도 내려놓고, 영적인 옳음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다윗의 큰 뜻을 무너뜨리는 요압의 옳음
다윗 가까이에서 늘 다윗과 함께했지만 항상 옳음을 가지고 살다가 인생을 불행하게 마감한 인물 요압이 있습니다. 한번은 다윗이 항복하러 찾아온 아브넬에게 인자를 베풀었습니다. 아브넬은 비록 적의 장수였지만, 그가 다윗에게 항복하러 와서 다윗을 도와 온 이스라엘을 다윗에게로 돌리겠다고 했을 때 다윗은 굉장히 기뻤습니다.
“아브넬이 자기를 대신하여 사자들을 다윗에게 보내어 가로되, 이 땅이 뉘 것이니이까? 또 가로되, 당신은 나로 더불어 언약하사이다. 내 손이 당신을 도와 온 이스라엘로 당신에게 돌아가게 하리이다.”(삼하 3:12)
전쟁을 해서 수많은 피를 흘리고 나라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귀한 피를 흘리지 않고도 통일 왕국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압이 아브넬을 죽이고 맙니다. 요압은 왜 아브넬을 죽였습니까?
“요압과 그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저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삼하 3:30)
요압은 아브넬이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것에 대해 복수를 한 것입니다. 사실 아사헬이 죽은 것은, 아브넬이 죽였다기보다 스스로 죽음을 자처한 것이었습니다. 전쟁 중에 아사헬이 아브넬을 잡으려고 뒤쫓자, 아브넬이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쫓아라. 넌 나를 이기지 못한다. 내가 너를 죽이면 네 형의 낯을 어떻게 보겠느냐?”라고 했습니다. 비록 싸움에서 패해 도망은 가지만 아브넬이 아사헬 정도는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사헬이 자기 발이 빠른 것만 믿고 아브넬을 뒤쫓다가 결국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처럼 아사헬이 죽음을 자초했지만, 요압은 아브넬이 자기 동생을 죽였다고 복수를 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영토를 넓혀갈 때 싸우지 않고 많은 나라를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 비법은 이러했습니다. 한 나라를 정복한 뒤 이전 왕이 다스릴 때보다 세금을 덜 걷고 압제도 없애서 백성들이 자유롭고 살기 좋게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웃 나라 백성들이 지금 왕 밑에 있는 것보다 알렉산더가 왕이 되면 삶이 훨씬 좋아지니까 싸우지 않고 항복했던 것입니다.
아브넬이 살아서 돌아갔다면 다윗이 쉽게 통일 왕국을 이룰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요압이 다윗 왕처럼 아브넬을 받아들였다면, 이스라엘 병사들이 ‘다윗이 아브넬을 대우해 준다. 우리도 다윗 편으로 가자’ 하고 다윗 편에 속했을 것입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 나라가 통일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귀한 일을 요압이 다 깨뜨려버렸습니다.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과 옳음을 따라 행동해 그 일을 가로막았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옳음을 가지면, 그것이 선악의 기준에서 나왔든지 영적인 데에서 나왔든지 옳음은 전부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는 일에 쓰입니다.

놋뱀과 같은 이전의 영적인 것들
사람들은 자꾸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옳으냐, 그르냐?’ ‘이것이 영적이냐, 육신적이냐?’ 그래서 옳다고 생각되면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영적인 일이 분명하다고 생각되면 그것을 붙들려고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영적인 옳음을 버리지 못하는데, 그것이 신앙적으로 성경적으로 옳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악의 기준에서 나온 옳음보다 영적인 옳음이 더 무섭습니다. 미갈이 다윗 편에 서서 아버지 사울을 배신하고 다윗을 구해주었다는 것, 이런 것들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가 다시 다윗의 아내가 되어 왕궁에서 살았지만 그 옳음이 미갈로 하여금 복된 삶을 다 잃게 만들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것이 육신적인 것이냐, 영적인 것이냐?’를 따져봐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옳은 마음이 들면 무조건 버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리 영적이어도 옳음으로 남으면 그것은 놋뱀과 같은 일을 합니다. 전에 영적이었든 육신적이었든 이전 것은 지나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놋뱀은 이전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새로운 하나님의 인도가 필요합니다. 전에 잘못한 것도, 악한 것도 다 이전 것입니다. 잘한 것도, 영적으로 산 것도, 믿음으로 산 것도 다 이전 것입니다. 다만 지금 하나님의 뜻 앞에 내가 드려지고 이끌림을 받는 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누구든지 ‘이전의 영적인 것이 놋뱀과 같은 악영향을 끼치는구나. 이것이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을 가로막고 복음의 역사를 가로막고 대적하겠구나!’ 하고 정확히 깨달으면, 신앙생활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며 갈등하는 시간이 줄어듭니다. 그것 때문에 고통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이 드려지는 귀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그리시려는 큰 그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노년에 이삭을 번제로 드리게 하여 큰 믿음의 삶을 완성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삭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믿음으로 얻은 것이다’고 마음에서 버리지 못하고 잡고 있으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방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그처럼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고,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대적하는 일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마음에서 이삭을 내려놓고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얻었던 영적인 옳음을 내려놓으면 하나님이 그려가고자 하시는 큰 믿음의 그림이 여러분의 삶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노년에 새로운 믿음의 세계를 나타내신 것처럼 독자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귀한 믿음의 세계를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 축복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선악의 기준에서 나온 옳음도 버리고 영적인 옳음도 버려서 놀라운 믿음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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