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행위가 아니요 오직 믿음으로
[설교] 행위가 아니요 오직 믿음으로
  • 글 | 임민철 (기쁜소식부산대연교회 목사)
  • 승인 2021.06.22 20: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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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호 기쁜소식
갈라디아서 강해_7편

 

 

갈라디아서 2장 15~16절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이고, 하나는 은혜입니다. ‘율법’과 ‘은혜’는 함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율법을 선택하면 은혜에서 끊어지고, 은혜를 선택하면 율법과는 단절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에 율법과 은혜가 공존해서 어떤 때에는 은혜고 어떤 때에는 율법이고, 이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다른 말로 ‘행위’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그 법대로 행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행위를 따른다는 것은, 율법을 행해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반대로 은혜를 따른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과 행위는 결코 공존할 수 없으며, 반드시 서로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행위를 따라가다가 믿음을 좇고, 믿음을 따라가다가 행위를 좇습니다. 이처럼 두 가지가 뒤섞여서 믿음의 길을 정확히 걸을 수 없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가리켜 ‘영적 타락’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을까?
갈라디아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의롭게 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인간에게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을까?’라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뒤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해입고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들 스스로 괜찮은 모습을 만든 것입니다. 그처럼 자신을 가리고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자유로웠겠습니까? 빛 앞에서 나뭇잎으로 만든 옷은 마르고 떨어져 부끄러움이 드러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 주저됩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자유를 잃었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바르게 해서 복을 받으려는 마음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 신앙생활이나 교회에 오는 것이 자유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뭇잎으로 옷을 해입고 나온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서 입혀 주셨습니다. 가죽 옷을 입고 나니까 이제 그들이 자신을 가리려고 하지 않아도 되어 자유가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얻은 참된 자유는 스스로 자신을 가리려고 했을 때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한 생명이 죽어서 자신의 가죽을 내어줄 때 그들이 비로소 자유를 누리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에서부터, 은혜로 당신 앞에 선 사람들은 자유를 누리지만 자신이 반듯하게 행해서 서려고 한 사람들은 자유를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40장에서 떡 굽는 관원장은 흰떡 세 광주리 위에 각종 구운 식물을 얹어서 왕 앞에 나아가는 꿈을 꾸었는데, 그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이 멸망을 당하는 사람의 모양을 성경에 아주 정확히 기록해 놓으신 것입니다. 흰떡은 우리 죄를 위해 찢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킵니다. 그것만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면 되는데, 그 위에 각종 구운 식물 즉 자신의 수고와 노력이 더해진 것을 얹어서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내가 반듯한 것을 들고 나가면 하나님이 나를 받으시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1장에도 그렇게 했다가 죽임을 당한 사람이 나옵니다. 사울이 죽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어떤 아말렉 사람이 다윗에게 와서 ‘사울이 중상을 당해서 나를 보고 죽여 달라고 하기에 살 수 없는 줄을 알고 죽이고 그 머리에 있는 면류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자기 옷을 찢었다고 했습니다. 함께 있던 사람들도 옷을 찢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이방의 아말렉 사람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운 왕을 죽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 행동으로 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다윗은 그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무엇을 받기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복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에서는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바르게 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잘못된 이 마음을 따라가면 신앙이 곁길로 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집니다. 

네가 범죄한들, 네가 의로운들…
욥기 성경을 보면,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입술로도 범죄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재산을 다 잃고 자식이 다 죽었을 때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이 거두어 가셨으니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사탄이 다시 욥의 몸을 쳐서 몸에 종기가 생겼는데, 얼마나 가려웠으면 몸을 기왓장으로 긁었다고 했습니다. 고름이 생기고 피가 흐르는데 개가 와서 핥았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징그럽습니까? 그 아내가 욥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욥은 빈말이라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욥을 향해 엘리후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하늘을 우러러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욥 35:5~8)
욥이 선한 것이나 악한 것이 하나님께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악이나 선이 하나님께 영향을 줍니까?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성도는 ‘내가 이렇게 살면 하나님이 벌을 주시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절대로 그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선하거나 악하거나 사람에게만 영향을 줄 뿐 하나님에게는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행위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결정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율법과 은혜는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행위와 믿음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섞이면 신앙이 안 됩니다.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힘있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부분 이 두 가지가 구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두 가지가 뒤섞여서 신앙의 문제를 만듭니다. 
믿음의 사람은 은혜에 매여 있고, 행위를 좇는 사람은 율법에 매여 있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살고 싶다면, 신앙이 자신의 행위와 상관이 있다고 믿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이 낫는 것이 자신의 행위와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 심판 아래 있는 인간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율법대로 행하려는 마음만 갖고 있지 행하지도 않고, 저주를 받는다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지도 않습니다. 전도서 8장에서,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임하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악을 행하기에 담대하다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잘못할 때마다 하나님이 징벌하신다면 모든 사람이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자하심으로 인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신이 괜찮은 줄 알고 은혜를 사모하지 않습니다. 
율법과 은혜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습니다. 율법이냐, 은혜냐?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때에는 믿음을 말하고 어떤 때에는 행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롭다고 하다가도, 자신의 행위를 보고 ‘내가 이런데 하나님이 나에게 역사하시겠나?’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신이 부족하고 연약하고 잘못한 부분이 있지만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하셨다. 온전하다고 하셨다.’ 하며, 그러니까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믿고 발을 내디딥니다. 그 사람이 은혜에 서 있는 사람이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구원받고 달라진 게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변하지 않고 은혜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변하는 자신에게 기대를 가지고 있으니까 믿음 편에 서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 3:9)
유대인은 하나님이 택하신 민족을 가리키고 헬라인은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로마서 3장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민족이든지 이방이든지 전부 죄 아래 있다고 이미 선언했습니다. 이어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와서 선한 척하면 안 됩니다.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데도 거짓말도 잘하고, 욕심도 많습니다. 사람은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잘 모릅니다. 자신이 변해서 행위가 바르면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 같은 생각을 버리질 않습니다. 

창세기에서 뱀이 아담과 하와를 속인 것처럼, 사탄이 우리를 속입니다. 그는 거짓말쟁이여서 늘 우리를 속입니다. 우리 마음에 ‘네 행위가 바르면 하나님이 복을 줄 거다’라는 마음을 넣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생각에 취해 잠든 우리를 깨어나게 하셔야 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20)
하나님이 율법을 왜 주셨습니까? ‘너, 더러운 사람이야. 너, 죄인이야.’ 이것을 알게 하려고 주셨습니다. 율법대로 살아서 의롭게 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의도와 다르게 율법을 듣고, 읽고, 가르칩니다. 율법을 지켜서 행위를 반듯하게 하려는 잘못된 사상에 빠져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롬 7:12~13)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사망이 찾아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를 드러나게 하려고 율법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해 죄가 드러나서 저주와 멸망의 심판 아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정확히 알면 나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미 저주 아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람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예수님 앞에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자기가 선하게 살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은 사람인 것을 알아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에게 임하는데, 사탄에게 속아서 엉뚱한 길, 멸망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행위를 중심에 두면 절대로 믿음이 바로 설 수 없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이 이루신 구속의 은혜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 없는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그 육체에 우리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서 죄의 값을 다 지불하셨습니다. 그것을 구속救贖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의 벌을 다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하지,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하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집니다. 무엇을 해서 복을 받으려는 마음을 가지면 예수님과 은혜와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구원받고 교회 안에 와서도 반듯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행위를 중심에 두면 절대로 믿음이 바로 설 수 없습니다. 저는 때때로 성도들을 보고 ‘왜 저렇게 하지? 저렇게 하지 않으면 좋겠는데…’라는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제 마음을 따라서 성도들을 대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까?’ 그것을 떠올리면 내 마음을 따라서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워진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사람의 뜻이 세워져야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세워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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