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라이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 글 | 이경숙(기쁜소식울산교회)
  • 승인 2021.10.07 11: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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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호 기쁜소식
보배와 질그릇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내 마음에 싹튼 불안이 삶을 사는 동안 점점 커져만 갔다. 5년 전에는 모야모야병 판정을 받고 극도의 불안증세로 고통해야 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섰을 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불안을 몰아내고 참 평안을 주셨다.

 

나는 작은 산골 마을에서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과 오빠 언니들의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해에 우리 집의 방패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아버지가 주무시고 계신 줄만 알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고 너무 슬펐다. 어린 나이에 슬픔을 이겨보려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교회에 가서 노래하고 율동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어서 모든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어느 날 첫째 오빠가 내가 교회에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니지 말라며 화를 냈다. 교회에 가면 죽이겠다고 했다. 오빠 말을 듣지 않자 대문 앞에서 낫을 들고 지키고 있었다. 도망가듯 교회에 가면 찾아와서 낫으로 위협했다. 너무 무서웠지만 교회에 대한 마음이 컸다. 몰래 교회에 다녀와 집에 늦게 들어오면 돌멩이가 날아오는 날도 많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홀시아버지를 모시고 자식을 키우며 혼자 큰 짐을 안고 사셨다. 시간이 흘러 할아버지도 아버지의 곁으로 가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나는 어머니 품에서 아무 말 없이 지켜보면서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파리가 죽을 때는 소리라도 내는데 할아버지는 갑작스럽게 세상과 우리의 곁을 떠나셨다. 어려서부터 가족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내 마음에 불안이 싹트기 시작했다.

점쟁이가 남편이 폐인이 된다고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고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교회에 발길이 점점 멀어졌다. 중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어머니를 위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졸업하자마자 대구에 있는 공장에서 일했다. 어머니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릴 생각에 열심히 살았다. 회사 기숙사에서 생활했는데 어느새 내 마음은 다시 친구들에게 쏠려버렸다.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하고 공장에서 나와 혼자 돈을 벌었다. 온갖 험한 일을 하며 번 돈으로 어머니에게 텔레비전과 냉장고 등을 사드렸다. 어머니가 좋아하실 거라 생각했다.
새 마음으로 시작한 열여덟 살 나이에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어머니에게는 알리지 않고 동거를 시작했다. 남편은 성실하고 나를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에게 구속받는 것이 싫어서 도망을 다녔다. 남편은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있는 곳을 다 찾아왔다. 당시에는 길거리에 점쟁이들이 많았는데 한 날은 점쟁이 할아버지가 나를 보고 남편을 버리면 남편이 폐인이 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내가 집을 나온 날이면 남편은 직장에도 가지 않고 술을 마시고 정말 폐인이 되었다. 더 도망 다니지 않기로 했다.
동거한 지 8개월 즈음 됐을 때, 결혼 승낙을 받으러 어머니에게 가기로 했다. 친정에 간다고 하자 시아버님이 힘들게 버신, 당시로서는 귀한 20만 원을 주셨다. 정말 감사했다. 어머니는 내게서 몇 달 동안 연락이 오지 않아 내가 죽은 줄로 아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사위 될 사람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너무 미워하셨다. 어머니를 만나러 가기 전날 꿈을 꾸었다. 화장실에 빠진 남편을 내가 손을 잡아 살리는 꿈이었다. 어머니는 막상 사위 될 사람을 만나니 마음을 열어 결혼을 허락해주셨다.

죽으면 모든 짐에서 벗어날 거 같았다
어머니의 허락을 받고 우리는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남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행복은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어려움이 닥쳐왔다. 시아버님이 쓰러지셨고, 내가 병간호하는 동안에 돌아가셔서 1년 상을 치루었다. 다음해에는 시어머님이 돌아가셨다. 열아홉 나이에 또다시 가족의 죽음을 옆에서 보아야 했다. 내 마음 구석에 있던 불안이 점점 커졌다.
시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우리 부부는 허름한 집을 한 채 마련하여 홀로 계신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살기로 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또 벌어졌다. 어머니만 모시면 될 줄 알았는데 오빠가 이혼하면서 어린 자식을 데리고 온 것이다. 남편이 힘들게 벌어오는 돈으로 어머니와 오빠를 모시고 조카를 키워야 했다. 내 삶은 없었다. 더욱이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지 않아 굿을 하고 부적을 지니고 살면서 속앓이를 많이 했다.
어느 날 죽음이 떠올랐다. 죽으면 모든 짐에서 벗어날 거 같았다. 목숨을 끊으려고 옥상에 올라갔다. 그런데 마침 먼 곳에서 불빛이 보였다. 빛 속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순간 그 빛이 있는 곳에 가보고 싶었다. 따라가 보니 사람들이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에어로빅 학원이었다. 사람들이 밝게 웃는 얼굴이 보였다. 나도 저렇게 웃고 싶었다. 그때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잡생각이 안 나도록 열심히 운동했다. 운동하고 있는 동안에는 마음의 불안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사는 것이 내 팔자인가 보다’
어머니가 원인 모를 병에 걸리셨다. 어머니를 간호하면서 무관심한 가족들을 원망하고 미워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오빠가 뇌졸중으로 뇌사판정을 받으며 돌아가셨다. 나와 가장 가까이 있던 두 분이 떠나셨다. 나를 힘들게 했던 분들이 돌아가셨으니 이제 고통에서 해방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시댁에 큰아주버님이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셨다. 이제 자유라고 생각했는데, 큰아주버님의 병시중이 다시 내 몫이 되었다. 하루에 서너 번씩 기저귀를 갈아야 했다. 마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내 팔자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남편이 아무리 잘해줘도 행복하지 않았다.
큰아주버님이 요양병원으로 가시면서 이제는 내 삶을 살고 싶었다.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옷가게를 열기로 했다. 내게 고생했다며 남편이 생일 선물로 가게를 해주었다. 가게가 잘되어서 돈도 많이 벌었다. 단골손님 중에는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숱한 손님들을 만나다 보니 종교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싫었다. 
한날은 사주를 보는 분이 내 손에 십자가가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몸이 많이 아파질 거라고 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들었고, 장사한 지 3년이 지났을 무렵 그동안 번 돈으로 여행이나 다니며 자유롭고 살고 싶어서 가게를 정리했다. 

나에게 왜 이런 고통이 찾아온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몸이 이상했다. 두통이 잦았고 신경이 예민하고 피로감을 자주 느꼈다. 꿈인지 현실인지 돌아가신 어머니가 항상 병원에 가보라고 하신 말씀이 귓가에 맴돌았다. 딸과 함께 병원에 가서 MRI를 찍었다. 결과는 모야모야병이라는 뇌혈관병 판정을 받았다. 희소병인데다가, 병세가 너무 많이 진행되어 수술해야 한다는 말이 오갔다. 병원에서 온갖 검사를 받았다. 너무 긴장해서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다. 나는 절망했고 불안에 빠졌다.
‘내가 살면서 잘못한 게 뭐가 있길래....’ 나는 가족을 위해 산 것밖에 없는데 나에게 왜 이런 고통이 찾아온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잠시도 눈을 감을 수 없었고, 극도로 불안하여 신경안정제를 먹고서야 잠을 잘 수 있었다. 
내 마음에 예수님이 계셔서 내 삶이 바뀐 것이 신기했다
수술 날짜를 잡고 기다리는데, 남편이 회사 동료와 식사를 하자고 했다. 알고 보니 딸 친구의 부모였다. 식사하면서 남편이 내가 아픈 이야기를 꺼냈는데 수술을 앞두고 친구 엄마가 병문안을 와서 ‘두려움이 빛으로 바뀔 수 있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는 미친 소리 같았다. 평생을 두려움 속에 불안 속에 알았는데 어떻게 어둠이 빛으로 바뀔 수 있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기가 생겼다. 내 어둠을 빛으로 바꿔보라고 했다.
얼마 뒤 당시 기쁜소식울산교회 김진성 목사님이 오셔서 복음을 전해주셨다. 말씀을 들으면서 지금 나는 아무 능력이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한순간에 구원받을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목사님은 계속해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의 값을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서 우리 죄가 온전히 씻어졌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마지막 질문으로 “어제까지만 해도 법당에 촛불을 켜 놓고 기도한 사람인데 값없이 성령을 받아도 괜찮을까요?”라고 물어보았다. 목사님은 
“예, 받아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편을 보지 않으십니다.”라고 하셨다. 순간 머리끝에서 발가락 끝까지 전율이 흘렀다. 가슴속에 무엇인가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고, 신기한 것은 그날 밤 나는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동안 불안하여 밤에도 불을 계속 켜놓아야 했고 신경안정제가 아니면 잠을 잘 수 없었는데 그날 이후로 불을 끄고 약도 먹지 않고 잠을 잤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곰곰이 생각했다. 내 마음에 예수님이 계셔서 내 삶이 바뀐 거였다. 너무 신기했다. ‘나는 죽을병에 걸린 것이 아니야’라는 믿음도 얻었다. 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했다. 목사님이 안수 기도를 해주시고, 성도들도 나를 위해 기도해주셨다. 정말 감사했다.

이사야 말씀을 가슴에 품고 15시간 동안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받기 전 목사님이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을 주셨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0:10) 이 말씀을 가슴에 품고 15시간 동안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중환자실에서 이틀간 회복해야 한다고 했는데 수술한 다음 날 정신이 들어 바로 일반병실로 옮겼다. 나는 중환자실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오빠가 내가 있던 병원에서 중환자실에서 돌아가신 기억 때문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중환자실을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모야모야병이 좌뇌와 우뇌에 다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우뇌를 수술한 것으로 좌뇌의 상태도 회복되었다. 의사도 놀라고 가족들도 놀랐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생각해 보니 내가 목사님을 만나지 않고 수술실에 들어갔더라면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죽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복음의 말씀이 힘이 되어 내 마음에 평안을 주고 믿음을 심어주어 모든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세계 최고 댄스 강사
몸이 회복되면서 교회의 인도로 울산실버대학에서 세계 최고 댄스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배운 댄스인데, 이제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한 댄스로 목적이 바뀌었다. 자격증도 따서 실버대학에서는 일주일에 두 번씩 수업하고, 주간 보호센터에서도 댄스를 가르치고 있다.
몇 달 전에는 지인의 권유로 유튜브에 ‘이경숙 TV’ 채널을 만들어서 댄스 동작을 간략하게  하나씩 올리고 있다. 울산실버대학 유튜브 채널에도 댄스 영상이 올라가는데, 노래 강사로 활동하는 박정아 씨가 댓글을 올리면서 나에게 다가와 주었다. 나는 기쁜소식울산교회 오세재 목사님에게 상담을 신청했고, 목사님이 박정아 씨에게 복음을 전해주셨다. 목사님은 박정아 씨가 살면서 짓는 죄를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다 넘기셨고, 예수님은 그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다 씻으셨다고 했다. 박정아 씨는 구원을 확신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하나님이 실버대학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 정말 감사했다. 박정아 자매님도 교회에서 노래 강사로 쓰임을 받고 있다.

하나님은 나의 딸을 사랑하셨다
나는 10년 만에 큰딸을 얻고 5년 후에 둘째 딸을 얻었다. 큰딸은 일찍 시집을 가서 가정을 이루고 살았는데 부부 갈등이 심해서 이혼하고 지금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내가 구원받고 큰딸이 구원받으며 어려울 때마다 교회가 인도해 주셔서 은혜를 입었는데, 이혼한다고 했을 때 이해할 수 없었고, 딸이 너무 미웠다. 
한날은 하나님이 내 마음에 간음 중에 집힌 여자의 말씀을 심어주셨다.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던 여자를 살리신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어떤 악을 행해도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에 전혀 부족함 없이 완벽하게 죄를 씻어주셨다는 목사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딸에 대한 미운 마음이 사라졌다. 그리고 딸의 모습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나의 딸을 사랑하고, 은혜를 입혀주고 계신 것이 감사하다. 앞으로 딸의 삶도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 거라고 믿는다.
둘째 딸은 고등학생 시절에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밤늦게 집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가족과 거리가 점점 멀어지자 남편과 딸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남편이 먼저 교회에 있는 대안학교에 보내자고 했다. 남편이 구원받기 전이었는데도, 딸로 인한 어려움이 컸던 것이다. 딸은 학교를 옮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처음에는 많이 어려워했지만 서서히 마음이 열리면서 구원받고 완전히 달라졌다. 표정도 밝아지고, 학교 생활도 즐거워하고 원망하던 아빠와도 사이가 회복되었다. 지금은 대학생이 되었는데, 우리 교회 대안학교에 들어가길 잘했다며 자주 간증한다.

남편은 로마서 8장 1절 말씀으로 구원받았다
내가 아플 때 남편은 주위에서도 놀랄 정도로 나를 극진히 간호했다. 내가 구원받고 너무 기뻐하며 교회에 가자 남편도 따라왔다. 그러나 남편은 몸만 따라왔을 뿐 하나님과 교회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교회에 가지 말라고 핍박을 하여 마음이 너무 어려웠다.
그런데 1년 전 하나님이 남편에게도 은혜를 입혀주셨다. 어느 날 내가 수술 후유증으로 갑자기 몸이 이상했다. 목사님에게 안수기도를 받으려고 전화했는데 먼 타지에 가셨다고 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자 남편이 ‘아랫 동네에 가면 당신이 좋아하는 구역 형제님 부부가 계시니 거기로 가자.’라고 했다. 남편 입에서 교회 형제 자매님 이야기가 나와서 깜짝 놀랐다.
남편은 나를 데리고 최영현 형제님 댁에 갔다. 그런데 최 형제님 부부를  보니 내 몸이 아픈 건 온데간데없고 “남편 교제 좀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최 형제님이 상을 펴고 성경과 메모지를 가지고 와서 남편에게 복음을 전해주셨다. 남편은 로마서 8장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말씀을 받아들이며 구원받았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너무 놀라웠다.
그 뒤로 남편은 예배 시간에 간증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나의 죄를 씻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고 간증했다. 남편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정말 감사했다.
지난 세월 내 인생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죽음, 불안, 두려움 등 온갖 어둠이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다. 인생이 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인생의 결국였다. 나를 불쌍히 여겨 복음을 만나게 하고, 우리 가족 모두에게 이 큰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고, 교회 안에 행복한 가정을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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