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나사로처럼 류재용을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라이프] 나사로처럼 류재용을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 글 | 류재용(기쁜소식부천교회)
  • 승인 2022.07.12 15: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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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호 기쁜소식
성도 간증

1982년 6월, 나는 살인자가 되었다. 집사람을 부추겨 춤을 추러 다니는 처형에게 제발 동생을 그만 데리고 다니라고 부탁했다가 모욕적인 말을 듣고는 분노가 치밀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죄를 짓고 말았다. 내 인생을 파멸로 몰아넣은 사람들이 다 죽었으면 나도 세상을 끝낼 수 있겠는데, 그렇지 못해 ‘만약 살아 나온다면 출소한 뒤 다 죽여야지’라고 생각했다. 
교도소 안은 열악했다. 더워도 선풍기도 없고 추워도 보일러도 없었다. 200kg이나 되는 목봉을 들고 체조를 하다 보면 머리에 물집이 생겨 살이 벗겨져 나갔지만, ‘살아서 나가기만 하면....’ 하고 이를 악물었다. 내 삶에는 꿈도, 소망도, 내일도 없었다.

 1988년 3월 1일, 교무과장님의 초청으로 박옥수 목사님이 수원교도소에 오셔서 집회를 가졌다. 그날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강당에는 250여 명이 모였고, 박 목사님은 300명이 먹을 통닭, 떡, 두유, 빵 등을 정성스럽게 준비해 오셨다. 기독교 모임에서는 빵과 우유가 아니면 얼마의 떡이 전부였기에 그날 음식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
목사님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점심시간을 빼고 말씀을 계속 전하셨다. 창세기 40장에 나오는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이야기를 자세히 해주셨다. 술 맡은 관원장이 포도나무에 달린 포도의 즙을 짜서 잔에 받아 바로에게 드린 꿈과 그가 복직될 것이라는 요셉의 해몽. 그 이야기처럼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 내 모든 죄가 씻어졌다는 사실이 마음에 분명히 자리를 잡았다. 목사님이 말씀을 마무리하며 죄가 없는 사람은 손을 들으라고 하시자, 그 자리에 있던 250명 모두 손을 들었다.
그때까지 나는 6년간 금식기도를 270일을 했는데, 구원받고 나니 그것들이 마음에서 아무 의미를 갖지 못했다. ‘출소하면 나를 이렇게 만든 인간들을 다 죽이고 나도 세상을 끝내겠다’라고 하던 복수심도 사라졌다. 새 삶이 시작되었고,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던 사람도 용서가 되었다. 
그 뒤로 박옥수 목사님이 교도소에 오시면 구원받은 많은 재소자들이 함께 성경공부를 했다. 목사님이 오실 때마다 내가 커피를 타서 드렸고, 목사님과 교무과장실에서 종종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마음이 밝아지고 새로운 소망이 생겼다. 

88올림픽이 끝난 뒤 일주일 귀휴를 나왔던 적이 있다. 대전에서 고속버스를 타면서 박옥수 목사님에게 서울로 간다고 전화를 드렸다. 나는 서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 고속버스 터미널이 한 곳인 줄 알았다. 그런데 박 목사님은 강남 터미널로 가시고, 나는 동서울 터미널에 있었다. 목사님 집에 전화를 하니 계속 통화중이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어서 답답했다. 그때 함께 있던 사람이 “교회는 다 그래. 나도 귀휴 가서 자매결연을 맺은 장로교회에 찾아갔는데 집사님들이 말로는 ‘왔어. 왔어.’ 하며 반가워하더니, 예배가 끝나고 만 원씩 모아서 주고는 다들 그냥 집으로 갔어.”라고 하며, 우리 교회도 그럴 거라고 했다. 마음이 흔들렸다. 
결국 통화가 되지 않아 목사님을 만나지 못했다. 이튿날 박 목사님이 목회하던 서울제일교회에 가서야 상황을 알았다. 목사님은 강남 터미널에서 나를 한참 기다리시다가 오지 않자 동서울 터미널로 가서 나를 찾으셨지만 내가 떠난 뒤였던 것이다.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만나는 것 같았다. 

1989년 8월 15일, 광복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10년 형을 받고 7년 2개월을 복역한 뒤였다. 구원받기 전에 나는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 재활용도 안 되는 세금만 축내는 사람,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는, 인생이 끝난 사람이었다. 그런데 구원받고 나니 복음을 위해 살고 싶었다. 출소하면 박 목사님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출소하던 날 자동차 세 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 목사님과 사모님, 서울 지역 목회자들이 나를 데리러 오신 것이다. 그날 탕자가 돌아왔다며 교회에서 큰 잔치를 벌였다. 나를 그렇게 환대해 주시는 교회가 너무 고맙고, 나에게 새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이 정말 감사했다. 
나는 부천평강교회(현 기쁜소식부천교회)에서 지냈다. 당시 내가 가진 돈은 200원이 전부였다. 교회는 아파트에서 세차하는 일을 해 보라고 나를 인도해 주었다. 복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이것도 훈련 과정이겠구나’ 하고 마음으로 따랐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아파트에 주차되어 있는 차들을 닦고, 8~10시에 돌아와 아침을 먹고 한숨 자고, 점심을 먹고는 전도하러 가거나 심방을 다녔다. 교회 형제들과 함께 다니며 나도 복음을 전해서 한 사람이 구원받으면 정말 즐겁고 행복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덧 교회 안에서 결혼을 했고, 귀여운 딸들이 태어났다.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구역장, 장년회장, 교육전도사, 실버회장 등 교회에서 많은 일들을 했다. 어떤 때에는 교회에서 준 직함이 7~8개가 되었다. 주님은 강도 만난 자인 나를 교회라는 주막에 데려다놓으신 뒤 엄청난 축복을 허락하셨다. 
교도소에서 구원받고 목회자가 된 김기성 목사님이 우리 교회의 담임 목사님으로 계실 때, 목사님과 함께 몽골, 모잠비크, 레소토, 케냐 등지로 해외 전도여행을 다녔다. 해외에 나가 교도소를 찾아가서 내 지난 삶을 간증하고 복음을 전하면 얼마나 행복한지 몰랐다. 케냐의 어느 교도소에서는 종신형을 받은 재소자 100여 명이 내가 전한 복음을 듣고 구원받아 말할 수 없이 감사했다. 중국 내몽고에서 가진 집회 때에는 아무리 이야기해도 꿈쩍도 하지 않던 아이스크림 공장에 다니던 사람이 어느 순간 성경 말씀을 듣고 마음이 낮아져서 구원을 받았다. 그 일이 우리 마음에 큰 기쁨과 감사를 남겼고, 그때 가진 집회에서 16명이 구원받아 행복한 전도여행이 되었다. 그 외에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이 도우신 일들을 되돌아보면 마음 깊이 감사가 남는다. 

지난 6월 20일 6시 25분쯤에 박옥수 목사님이 전화를 하셨다. 보고 싶으니 아무 때나 기쁜소식강남교회로 오라고 하셨다. 남미에 전도여행을 다녀오신 뒤 아직 피곤하실 텐데 나를 기억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다. 그날 목사님을 뵈었는데, 목사님이 우리 가족의 안부를 묻더니 장로로 추천해 주고 싶다고 하셨다. 옆 사무실에 계시던 우리 선교회를 인도하는 목사님들에게 함께 가서, 박 목사님이 “류 형제를 장로로 추천하려고 하는데 어떤가요?”라고 하시자 목사님들이 좋다고 하시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하셨다. 
어느덧 나이가 많이 들어 장로 직분을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나를 기억해 주셔서 감사했다. 장로 안수를 받던 날, 박 목사님이 요한복음 11장 말씀을 해 주셨다. 죽고 썩어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예수님이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처럼 예수님은 죽어 썩은 냄새가 나던 류재용을 풀어놓아 다니게 하셨다. 그 말씀이 내 마음에 큰 울림을 남겼다. 
이미 포기한 인생이었던 나를 주님이 살리셨고, 복음과 함께 걸어다니며 행복하게 살게 하셨다. 뿐만 아니라 장로의 직분을 주셔서 나이가 많이 들어도 교회와 성도들을 섬길 수 있게 해주셨다. 하나님이 변함없이 나를 기억하고 사랑하셔서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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