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공생과 기생
[오피니언] 공생과 기생
  • 글 | 윤준선(기쁜소식한밭교회)
  • 승인 2024.03.13 15: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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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호 기쁜소식
자연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섭리_7편

지구에 존재하는 생물종은 수백만에서 수조 개로 예상한다. 범위가 넓은 만큼 가늠하기가 어렵다는 얘기일 것이다. 아직도 인간에 의해 탐색되지 않은 수많은 종들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생태계를 이루고 사는 이 생물종들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고 상호작용하며 살아간다. 생물종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보이고 싶으신 하나님의 마음은 뭘까?

‘혼자’ 아닌 ‘함께’, 공생
독립된 개체로서 식물의 생장은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다양한 미생물과 상호작용하며 일생을 살아가는데, 그 중 70~90%의 육상 식물이 균근류라 불리는 곰팡이와 공생한다. 특히 내생 균근류arbuscular mycorrhiza는 식물과 공생하며 식물의 생장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내생 균근류의 균사가 식물 뿌리 주위에서 뿌리털을 통해 뿌리 내부 피층 세포(뿌리 표면의 표피 세포 안쪽에 있는 세포)에까지 침투한다. 피층 세포는 균근류를 인지하고 균근류와 공생 관계를 잘 유지하도록 가지처럼 뻗어 나가는 구조를 만들어낸다. 피층 세포의 표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세포 안으로 들어와 상호관계를 극대화한다. 이는 어느 한쪽의 선호에 의한 것이 아닌 상호 합의된 결과이다. 각각의 생물체가 서로를 만나면 그런 구조를 갖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는 것이다. 
식물과 곰팡이, 각자 생존하는 데 아무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생물체는 하나가 되듯 연결된다. 이런 관계를 만드는 것은 각자의 서로 다른 능력으로 상대의 부족함을 채우고 자신의 부족함이 채워지기 때문이다. 균근류의 균사가 뻗쳐 나가 식물의 뿌리가 닿지 않는 곳에서 인산, 아연, 구리와 같이 토양 내 이동이  되지 않는 무기물을 흡수하고 이를 식물에게 제공한다. 식물은 광합성을 통해 얻은 탄수화물을 균근류에게 전달하는데 전체 광합성 양의 20%를 제공하는 식물도 있는 걸 보면 식물과 균근류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한지 알 수 있다.
‘밭에서 나는 고기’라고 불리는 콩은 식물 중에서 단백질을 가장 많이 함유한다. 어떻게 콩과科 식물은 수많은 작물을 제치고 일등 단백질 공급원이 되었을까? 콩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다. 하지만, 그런 능력을 가진 다른 생명체의 도움을 받아 단백질을 구성하는 질소 성분을 얻는다. 뿌리에서 공생하는 뿌리혹박테리아가 그 주인공이다. 
콩과 식물의 뿌리에서 플라보노이드라는 성분을 토양으로 분비하면 주변의 뿌리혹박테리아가 이를 인식하고 노드 인자(뿌리혹 유도 인자)라고 하는 성분을 분비한다. 노드 인자를 인식한 식물은 마치 고속도로를 개설하듯 뿌리털을 관통하는 통로를 만들어 박테리아가 뿌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한다. 뿌리의 세포들은 손님 맞을 준비로 분주해진다. 박테리아가 거처할 공간을 만들기 위해 특별한 줄기세포를 만들고, 세포 증식을 계속해 식물 뿌리에 혹처럼 달린 뿌리혹을 만든다. 뿌리혹을 구성하는 세포들은 세포 안에 박테리아가 머물 방을 만들고 뿌리혹박테리아와의 동거를 시작한다. 오랫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인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일사불란하고 정교하게 작업이 이루어진다. 뿌리 안에 들어와 터를 잡은 뿌리혹박테리아는 식물에게는 없는 니트로게나아제nitrogenase라는 효소를 이용해 공기 중의 질소를 식물이 이용 가능한 암모니아로 변환시켜 준다. 반대로 식물은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이용해 광합성을 하고 뿌리혹박테리아에게 탄수화물을 공급한다.
식물 생장에 반드시 필요한, 그래서 작물 재배를 위한 비료로 공급되는 질소, 인산, 칼륨 중 균근류는 인산을 식물에게 제공하고, 뿌리혹박테리아는 질소를 식물에게 제공하는 생물 비료와 같은 기능을 한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서로 얽혀 만들어내는 하모니는 생물계를 유지하도록 지탱하는 힘이다.

‘네 것’이 ‘내 것’, 기생
‘새삼볶기’라는 경상도 지방의 풍속이 있다. 콩밭에 새삼이 자라지 못하도록 콩을 볶거나 짚단을 태우는 일이다. 한해살이 덩굴식물로 잎이 없는 황갈색의 철사 모양을 한 새삼은 다른 식물에 기생하며 일생을 보낸다. 번식은 씨앗으로 하는데, 땅에서 발아한 뒤 기생할 식물을 찾으면 뿌리와는 다른 기생근을 이용해 숙주 식물 안으로 침투하고 물과 영양분을 흡수한다. 이때 가지고 있던 땅 속의 뿌리는 사라지고 온전히 숙주에게만 의존한다. 잎이 없어서 스스로 광합성을 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꽃을 피우는 시기까지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숙주 식물이 만들어내는 신호 물질을 이용해 결정된다. 숙주 식물이 꽃을 피우는 신호 물질을 만들고 꽃을 피우는 시기가 되면 그에 발맞춰 자신도 꽃을 피우는 것이다. 
‘숙주 식물과 합이 잘 맞는구나’ 싶지만 새삼의 목적은 다른 데 있다. 숙주가 꽃을 피우기 전에 자신이 먼저 꽃을 피우면, 충분히 성장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영양분을 생식 성장에 써야 해서 불리하다. 반대로 숙주보다 한참 뒤에 꽃을 피우면, 숙주가 생식 생장을 멈춰 에너지 생산이 활발히 일어나지 않아 자신의 생식 생장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을 수 없어 불리하다. 어떻게든 숙주의 생애 주기에 맞춰 때에 맞는 영양분을 얻을 수 있게끔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한 길을 선택한 것이다. 새삼이 심하게 퍼지면 작물이 질식해 죽기도 한다. 오롯이 자신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내가 주인이고 우선되어야 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영과 육체가 공생하는 성도의 삶
거듭난 성도에게는 두 가지 생명체가 함께한다. 거룩한 영과 육체다. 둘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부딪힘이 일어나기도 하고, 함께하여 놀라운 일을 이루기도 한다. 성경은 성도의 육체가 불의의 병기가 될 수도 있고, 의의 병기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생물의 경우처럼 육체가 영과 공생할 수도 있고, 기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같은 몸을 가지고 너무나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도 하고, 형편없는 열매를 맺기도 한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성도에게는 육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모른다. 몸이 움직이고 입을 열어 말할 때마다 사람들이 거듭나고,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해지는 놀랍고 아름다운 역사가 이어진다. 반대로 형편없는 열매를 맺는 성도에게는 육체가 세상에 속한 욕망을 끝없이 만들어내는 고통의 산실이다. 육체의 욕구를 채울수록 우리 영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교회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길을 가르친다. 자신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좇아 육체를 사용하도록 인도한다. 고린도전서 6장 13절에서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라고 했다. 서로 위하며 공생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공생과 기생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에게 소중한 가르침을 준다. 


윤준선 이학박사. 카이스트와 동 대학원에서 식물학을 전공하며 식물의 면역과 발달을 연구하였다. 현재 ㈜팜한농에서 인류의 먹거리 생산을 위해 작물 재배에 유용한 유전자와 작물보호제를 연구, 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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