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의 땅 아프리카 (서영애)
소망의 땅 아프리카 (서영애)
  • 임미선
  • 승인 2004.09.25 01: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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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전도여행 다녀온 동울산 서영애 자매님 간증입니다.


나이로비나이로비 공항에 비행기가 내린 시간은 오전 8시경이었다.
드디어 아프리카에 도착한 것이다.
수속을 마치고 나오니까 최재혁 전도사님께서 마중 나와 계셨다.
교회에서 빌린 25인승 버스를 타고 나이로비 교회에 도착해서 보니까 하도 넓어서 들판 같았다.(나이로비교회부지가 7,500평임)
넓은 땅 한 켠에 150평의 3층 건물이 자연석으로 예쁘게 잘 지어져 있었다. 피부색이 다른 검은 형제자매들이 여기저기 모여서 교제하며 자유롭게 오가고 있었다.
모두들 박목사님께서 오신 것을 무척 기뻐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날 저녁 나이로비대학에서 그라시아스합창단과 대학합창단이 공연하는 것을 보았는데 꿈만 같았다. 우리는 저녁준비 때문에 끝까지 못보고 왔지만 정말 감격 그 자체였다.

다음날은 아프리카선교 10주년 나이로비교회 헌당예배였는데 한국에서 간 부인자매님들은 한사람도 참석하지 못하고 음식 준비를 해야 했다.
집회 끝날 때까지 내가본 나이로비 교회의 형제자매님, 현지 사역자님, 선교학생들, 모든 사람들이 너무 순수하고 마음이 아름다운 분들이었다.마치 어린아이들처럼…….
우리는 거의 저녁집회에만 참석할 수가 있어서 말씀은제대로 듣지 못하고 (조느라고)그 곳의 형편만을 보고 온 것 같다.
형편은 이 곳과는 많이 달랐다. 물이 부족하고 불도 뒷받침이 잘 안되고…….
음식 하는데 꼭 필요한 두 가지가 다 제대로 안되니까 많은 시간이 허비되었다. 설거지 하는데 한 시간 이상이 걸리고 어떤 때는 물이 안 나와서 일손 놓고 있을 때도 있고 그래도 현지인들은 전혀 불평 없이 물을 어디에선가 머리에 이고 와서 부어주었다.
식사 준비하면서 현지 형제자매님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곳 사람들은 너무 자유롭게 생활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피곤하면 그냥 아무데서나 누워 자고 맨땅에도 앉아있고 빨래도 구정물에다 해서 풀밭 아무데나 널어놓고 우리들처럼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저렇게 하면 되고 하는 법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 너무 좋았다. 맨발로 다녀도 아무도 뭐라는 사람 없고…….
나는 식당일하면서 밥은 현지인들이 먹는데 가서 자주 얻어먹었다.
(우갈리.기데리.마토케. 이름모를 음식.알지못하는 후식까지)
집회가 아니라 수양회 규모로 동부지역교회 형제자매들과 새로온 분들이 와 있어서 나이로비교회에는 60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함께 숙식을 했다. 그래서 어디를 가나 흑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정임이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아프리카를 못 잊어하는지, 왜 다시가고 싶어 하는지 몹시 궁금했었다.
‘정임이가 이곳에 와서 살았었구나.’ 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었는데 그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화장실에 물이 안 나와서 불편하고, 아침마다 숯불을 피워서 밥해야 되고, 포장 안 된 길이라서 먼지가 감당이 안 되고, 애들은 아무데나 누워 자고,(어느 날 오후 화장실 가는데, 웬 시커먼 쓰레기가 있어서 같다 버리려다가 기절할 뻔했다. 그것이 사람이었다. 그냥 땅에 누워 자고 있었다) 샤워도 제대로 못하고, 불편한거 투성인데 정임이는 뭐가 좋다고 여기에 또 오려고 하는지 오지 말라고 말리고 싶다.
내가 가장 불편했던 것은 말이 통하지 않는 거였다.
영어도 못하고 스와힐리는 더 못 하고 정임이하고 가장 친했다는 헬렌이라는 선교학생이 있는데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아 제대로 이야기도 못했다.

시간이 얼마나 빨리 가는지 5일 탄자니아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난생 처음 육로로된 국경을 통과하고 버스를 한번 세워주는데…….화장실도 없는 황량한 평원에 내려주면서 볼일보고 오라고 했다. 그것도 빨리. 형제들은 이쪽, 자매들은 저쪽, 캄캄한 밤에 도로가에 일렬로 앉아서 볼일보는것 이때 아니면 언제해보냐싶었다.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다. 나이로비에서 정성껏 싸준 도시락을 버스에서 맛있게 먹었다. 차창으로 보이는 화면은 지루하리만치 똑같았다.(토네이도도보고, 성경이 이해되는 부분이 많았다)
넓은 광야만이 계속되었다. 16시간이 지난 다음날 새벽2시에 탄자니아 다에르살렘교회에 도착해서 서둘러 자리 잡고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교회가 이렇게 아담하고 예쁠 수가 없었다. 400평쯤 되는 대지위에 40평가량 되는 건물…….마당에는 갖가지 과일나무(코코넛,포포,빠숀,팜추리,.…….) 이국적인 맛이 물신풍기는 그런 집이었다. 처음 왔을 때는 집이 쓰레기장 같았는데 다 수리하고 청소했다고 한다.(월100달러 주는 셋집임)

나이로비에서 큰 사모님께 김 종덕선교사님에 대한 간증을 들은 것이 생각났다. "김종덕 선교사님은 몸으로 때우는 엘리야 같은 선교사야" 하시면서 눈물을 글썽이셨었다.
처음 아프리카에 오셔서 많은 어려움을 몸소 당하시고 미고리에서는 3일을 굶고 나니 배가 너무 고파 걸을 힘이 없어서 기다시피 흑인에게 가서 빵좀 달라고, 물 좀 달라고 구걸해서 얻어먹으며 복음을 전하셨는데, 미고리에는 거지목사라고 소문이 났다고 하셨다.
탄자니아에 가셔서는 앞에 사역하신분이 도망가버린뒤라서 형제자매들도 다 떠나고 없고, 정부에서 우리 선교회를 받아주지 않으려고 해서 날마다 가서 눈물로 호소하고 사정하고 하시는데, 아직도 다 해결되지 않아서 어려움을 당하고 계신다고 했다.
탄자니아 정부 측에서 선교사님이 너무 불쌍해서 내?지않고 그냥 두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정말 고생 많이 하신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눈에 가득 고였었다.
목사님이 얼마나 여위셨는지 얼굴전체에 눈만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전)국회의사당 건물을 빌려서 집회를 하는데 타운에 전도를 나갔다.
사람들이 전단지를 얼마나 잘 받아 가는지 자기들이 와서 받아가고 버스에 탄 사람들도 달라고 손을 내밀고 순식간에 전단지가 다 나갔다.
없어서 못 줄 지경이다. 그날은 식사당번이라서 못가고 다음날 집회에 갔다.
많은 사람들이 박목사님 말씀을 들으면서 기뻐하는 것을 보았다.
"38년 된 병자가 나아서 걸어갔습니다!"
하니까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다. 우리들과 말씀 듣는 태도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말씀 중간에 박수치는 것은 생각도 못하는 일인데…….
그런 일들이 몇 번씩이나 있어진다.
김 목사님 딸 일애가 키스와힐리로 통역을 했는데 박목사님과 호흡이 척척 맞았다. 몸놀림 하나하나 까지 똑같았다.
일애가 말라리아에 걸려서 힘들었을 것인데. 통역에 온 마음을 쏟아서 하고 있는 것을 보니까 코끝이 찡해왔다.
말씀을 마치고 죄 사함 받은 사람 손들어보라고 했을 때 10여명 가까이 손을 들고 말씀을 더 자세히 듣기를 원하는 사람 손들라고 하니 4-5명이 들었다.
이 머나먼 아프리카에서 복음을 전해서 구원 받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 였다.
나이로비 집회에는 새로운 분들이 150명 정도 와서 복음반에 200명 가량 매일 말씀을 들었고 탄자니아에는 50여명의 분들이 온 것 같았다.
(나이로비 100명 정도 탄자니아 20명의성도가 있음)

9일 형제자매들과 그라시아스합창단들이 버스로 사모님과 함께 나이로비로 떠나고 박목사님도 아침 식사 후 떠나시고 우리부부와 뉴욕교회 부부 한 팀이 자리가 없어서 남아 있게 되었다.
후속집회가 계속되는 가운데, 일애와 동생재혁이는 말라리아로 쓰러졌고 단기6명과 함께 집회에 참석했다. (현지인들은 형제자매 합쳐서2-30명 정도참석)
케냐 부시아교회 넬슨목사님이 강사였는데 어쩌면 한국의 종들과 말씀이 똑 같았다.
단기선교 형제님의 통역으로 말씀을 들었는데 그 목사님 간증을 들으면서 한국인이나 아프리카인이나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사람은 전부 똑같다는 마음이 들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어렵게 사시면서도 우리들을 얼마나 극진히 대접해주시는지 비싼 생선을 구하셔서 우리들을 먹여주시는 마음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자연산 광어(회해서 실컷 먹을 만큼), 조기, 꽃게, 옥돔, 문어 선교사님가족들은 일년에 한번 드시기도 힘든 형편이실 텐데 우리가 뭐라고 이렇게 대해주시나해서 싶어 감사했다.

10일 자상하게 아버지처럼 챙겨주시고 버스터미널까지 태워다주시고 주의사항도 일러주시는 김종덕목사님의 배웅을 뒤로 하고 버스에 올랐다.
단기선교 2명 우리부부와 뉴욕교회부부6명이었다.
미고리 단기선교사 2명이 같이 가기로 되있었는데 인숙이가 말라리아 걸려서 나이로비 이정현단기선교사가 동행했다.
버스에 탔는데 다리에 뭐가 기는 것 같아서 보니까 바퀴벌레였다.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다. 내 옆에 앉은 민주(미고리단기) "심하다" 하면서 계속 손바닥으로 때리고 있다.
현지인들도 "너무 많다" 그런다면서 민주가 통역해 주었다.
종점에 다 온줄 알고 내렸는데 정현이가 물어보더니 종점이 아니라고 해서 다시 버스에 탔다. 알고 보니 운전사 밥 먹느라고 한 시간이나 기다린 것이다.
그곳에서 종점은 300미터가량 되는 곳이었다.
그 사람들은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은가 보다. 버스에서 내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얼마나 황당하던지 기가 막혀 말이 다 안 나왔다.
세상에! 종점 코앞에 두고 밥 먹는다고 한 시간이나 기다린다는 게 말이나 되는지…….
`아! 여기는 아프리카지.` 하고 마음을 달랬다. 한 사람도 요동 않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더 신기했다.
최전도사님이 마중 나오셔서 무사히 나이로비교회에 도착했다.

사람들도 많이 없고 조용해서 생각 할 수 있는 시간도 있고 현지 사람들과 교제 할 수 있는 시간도 많아서 좋았다.
아프리카에는 아름다운 꽃이 많은데 그중에 가장 크고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이 있었다. 그 꽃의 이름은 기쁜소식선교회에서 파송한 "단기선교사" 바로 그들이었다.
그보다 더 아름다운 꽃은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선교사님들을 도와서 복음의 일을 하고 있는 그들, 박목사님께서 그토록 그들을 사랑하시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거 같다.
험한 일, 굳은 일 마다 않고 묵묵히 해내고 하나님을 바라는 그들을 대하면서 내 마음에는 감사함이 가득 전해오는걸 느낀다.

현지 자매님들과 교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내가 시험 들어 있을 때 정임이의 부탁으로 다시 교회에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했다고 한다.
어떻게 교회를 안나가게 되었으며 어떻게 돌아오게 되었는지 너무 듣고 싶어 했다.
나는 자세하게 간증해 주었다. 자매들이 궁금해 하는 모든 부분을 …….
시험 들었던 간증 하니까 너무들 좋아했다.
한국교회와 흐름이 똑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 정임이 부모님이 올 거라는 상상도 못했는데 와서 우리에게 소망이 되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우리가 많이 기도 했는데 정임이 부모님이 돌아온걸 보면서 구원받지 않은 우리 부모님들, 가족들도 구원받게 하실 거라는 소망이 생기고 믿음이 들어왔어요!" 라고 …….
나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를 위해서 아프리카에서까지 하나님께 기도 했다니…….` 가슴이 저리도록 아파오는 것 같았다.
‘교회의 사랑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정임이가 단기선교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고 난후에 인터넷을 통하여 가족들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서 전부 일어나서 만세를 부르고 박수 쳤었다는 말도 듣게 되면서 나는 항상 교회에 누를 끼치는 자이고 걱정거리만 만드는 자 인 것을 부인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교회와 주의 종을 향하여 새롭게 감사함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확실히 알 수가 있다. 정임이가 그토록 아프리카에 가고 싶어서 목메는 이유를…….아이들과 한나절을 보냈는데 눈망울이 그렇게 맑고 천진할 수가 없었다. 육신적인 형편은 다 어려울지라도 그 곳 사람들의 마음을 잊지 못 하는 이것이 정임이로 하여금 아프리카를 못 잊게 하는 것 같았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내년에는 정임이가 다시 나이로비에 오게 될 것입니다."
라고 내가 간증했을 때 형제자매들이 예배당이 떠나갈듯이 박수를 쳤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나 역시 여러분들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약속을 하고 왔다.
하나님이 간증하게 하신 것을 나는 믿는다.
박목사님께서 나에게 "자매 가지 말고 여기서 살지. 도사모 이 자매 여기서 데리고 살아 보내지 말고"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내 마음이 뜨끔했었다. 정말 살라면 어쩌나 하고…….
하지만 하나님이 보내신다면 살수 있는 마음도 주시고 보내실거라고 확실히 믿는 마음이 있다.
나를 아프리카에 보내셔서 많은 것을 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모든 것들이 오래전 박목사님 마음 안에 있었던 세계라는 것이 너무 감사해서 이번 여행 동안 많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었다.
15년 전에 대전 수양관에서 말씀하셨던 사실이 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믿을걸!` 하는 마음이 들어서 다시 한번 나는 종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10년 후면 아프리카에서 많은 선교사를 다른 나라에 파송할거라는 목사님의 말씀을 나는 들었다. 이제는 그렇게 될 것이라 믿을 수가 있다.
말라리아도 무섭고, 강도도 무섭고, 어려운 형편도 싫지만 복음이 너무 귀하고 그 곳 심령들이 너무 불쌍하기 때문에 그 나라 사람이 다되어 버린 선교사님들과 그 가족들을 보면서 나는 지금까지 너무 많은 것을 누리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고 말이 통하고 들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복음을 마음껏 전하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자책감이 든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나의 삶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내가 누리고 있는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르고 살았었는데 늘 부족해서 뭔가를 더 채워야 할 것처럼 내 것을 챙기는 동안 선교사님과 아이들은 배고픔과 말라리아라는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내 가족과 나에게 이러한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한없는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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