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도 눈을 뜨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아침도 눈을 뜨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경숙
  • 승인 2014.01.27 10: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망가진 청소년기
대구에서 1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난 나는 꿈이 많았다. 하지만 내 앞에 주어진 현실은 너무나 냉혹했다. 나는 그저 소박하게 따뜻한 가정에서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술만 드시면 엄마와 우리 남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피해 매일 도망다니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었다.
엄마는 결국 병을 얻어 집을 나가셨다. 그리고 그때부터 내 앞에는 수많은 새엄마가 거쳐갔다. 나는 서서히 망가져 갔다. 꿈을 꾸며 자라야 할 청소년 시절을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술 담배를 하고, 잦은 가출로 비행 청소년으로 지냈다. 하지만 나는 내 잘못이 아니라고 소리쳤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은 부모님 탓이야!’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되뇌었다.

수면제 70알을 아무 미련 없이 입에 털어 넣었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면서 나는 집을 떠났고, 가족과 인연을 끊었다. 새 인생을 찾고 싶었다. 새로운 미래를 생각할 즈음 한 남자가 내 곁에 다가왔다. 세상 남자들이 다 아버지 같을 것이라는 생각에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못했던 나에게 그 사람은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 가정적이고 성실한 남편을 만나서 행복한 보금자리를 만들기 원하는 내 작은 꿈이 그 사람과 함께라면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와 결혼했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다시 악몽이 시작되었다. 남편은 술만 마시면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괜찮아지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폭력의 강도는 심해졌다. 나는 전보다 더 쉽게 무너지기 시작했고,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내 인생은 왜 이럴까? 어린 시절은 불행했지만 결혼 생활만큼은 행복하게 살고 싶었는데….’ 부모님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는데, 나 또한 그 길을 가고 있었다.
아무 소망 없던 나는 삶의 끈을 놓고 싶었다. 어느 날, 무작정 동네 약국들을 돌아다니면서 수면제 70알을 샀다. 그리고 미련 없이 입에 털어 넣었다. 깊은 잠에서 깨어 보니 어느 병원이었다. 수면제를 먹으면 4~5시간이면 몸에 흡수된다고 한다. 그래서 여섯 시간이 지난 후에야 발견된 나를 의사는 포기했다. 마지막으로 위세척이나 한번 해보자고 했는데, 탁구공처럼 뭉쳐져 있던 수면제 70알이 놀랍게 밖으로 나왔다고 했다. 의사는 이런 경우는 기적이라고 했다. 자살 기도 후 나는 아무 후유증 없이 퇴원했고, 남편은 몹시 놀랐는지 얼마 동안은 나에게 잘해 주었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남편은 다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나도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9.11 테러 사건이 일어났던 날 나는 집을 나와서 지방의 어느 도시로 내려가 정착했다. 아이들을 보고 싶은 것도 잠시, 먹고 살려면 일을 해야 했다. 낮에는 미친 듯이 일했고, 밤에는 내 인생이 서글퍼서 매일 소주 두세 병을 마셨다. 미친 듯이 술을 마셔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
멋지게 살고 싶었다. 보란 듯이 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내 편이 아니었다. 나는 술을 마시기만 하면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고, 폭력을 쓰고,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으면 집에 와서 살림을 부쉈다. 내가 그렇게도 싫어했던 아버지의 습성, 그것이 내 몸에 그대로 스며들어 있어서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해 하나 둘 내 곁을 떠나갔다.

게임에 빠져 살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6년이…
언젠가부터 친구들의 권유로 인터넷 온라인게임에 빠져들었다. 게임 세계에서는 내가 최고였다. 피터지게 싸워서 상대 종족을 죽이면 만족이 되었다. 짜릿하고 좋았다. 직장도 그만두고, 36~48시간 잠도 자지 않고 담배를 피우고 소주와 컵라면을 먹어가며 게임에 빠져 살았다. 나는 점점 미쳐가고 있었다. ‘아, 이러다가 내가 죽겠구나!’ 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40을 넘어 5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무려 6년이란 세월을 방구석에서 폐인처럼 살았던 것이다.
세상과 단절하고 은둔한 6년의 세월은 나에게 친구와 돈, 모든 것을 가져가버렸다. 지나온 삶들은 나에게 아픔뿐이었다. 어디에도 나의 손을 잡아 주는 이가 없었고, 위로해 주는 이도 없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괴로움을 잊으려고 소주를 끼고 미친 듯이 마셨다. 술은 잠시나마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유일한 친구와 같았다. “이 밤에 잠이 들면 내일 아침에는 영원히 눈을 뜨지 않게 해주세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고 넋두리를 하며 잠이 들곤 했다. 결국 나는 다시 삶의 끈을 놓고 싶었다.

가슴 밑바닥에서 무언가가 날 이끌듯 그 이야기들을 다시 듣고 싶었다
지옥 같은 인생을 정리하려고 하자 가족이 생각났다. 마지막으로 가족이 보고 싶어서 찾아갔다. 집을 나가셨던 엄마는 하나님을 만나 병이 나았고, 오빠도 교회에서 결혼해 올케 언니와 조카 둘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전에 엄마나 오빠와 전화통화를 하면 늘 하나님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런데 가슴 밑바닥에서 무엇인가가 날 이끌듯 그 이야기들을 다시 듣고 싶어졌다. 대구에 있는 엄마 집에서 술을 마시면서 넋두리로 불러본 하나님이 생각났다. ‘교회에 가봐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났다
2013년 8월 18일, 처음으로 동대구중앙교회(현 기쁜소식수성교회) 주일 예배에 참석했다. 목사님이 하시는 설교 말씀이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예배를 마치고 목사님과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목사님이 하시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냥 울기만 했다. 견디기 힘든 인생의 무게에 지쳐서 그저 눈물만 났다. 그리고 절망의 늪에 빠져 있는 나에게 누군가 손을 잡아 주는 듯한 따뜻함이 밀려왔다.

돌이켜야겠다
그 후로 나는 교회에서 갖는 예배와 모임에 참석해서 말씀을 듣고 신앙상담을 받았다. 하루는 사모님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짜증만 나고 집에 가고 싶어서 교회를 뛰쳐나왔다. 엄마 집에 가서 소주를 사서 마시는데,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다면 또 술을 마시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 속에서 살아가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마음을 돌이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교회에 찾아가서 사모님께 “잘못했습니다” 하고 말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마음을 꺾어 보는 것이었다. ‘아, 이런 것이 마음을 꺾고 내 생각을 버리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때 교회에서 수성구 이천동에 마련한 부지에 예배당 공사를 시작했다. 이상하게 그곳에 마음이 갔다. 하루는 예배를 마치고 목사님께서 “예배당 공사에 모두 한 마음으로 봉사하시면 좋겠습니다” 하고 이야기하는데, 나도 함께하고 싶었다. 그래서 예배를 마치고 목사님에게 “저도 가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목사님이 허락하셔서 다음날부터 나도 예배당 건축 현장에서 자매님들과 함께 봉사를 했다.
하루 종일 철근을 엮고 나르는데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 봉사하는 자매님들도 전혀 힘든 기색 없이 즐겁게 일하는 모습이 참 신기했다. 자매님들의 그 기쁜 마음이 내게도 흘러들어와 나도 매일 즐거웠다. 오랫동안 웃음을 잃고 살았던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웃고 있었다. 그런 나 자신이 신기했다.

 
그날은 그들의 이야기가 전부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하루는 목사님이 창원에 있는 집을 정리하고 대구로 오면 좋겠다고 하셨다. 망설이지 않고 “네” 하고 대답했다. 마음 한편에서는 예배당 건축 봉사를 마치고 집에 가면 엄마와 부딪힘이 있기에 조금 망설여지기도 했다. 그 후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엄마 집에 돌아갔는데, 이상하게 엄마와 자꾸 싸웠다. 내 속에 가득한 엄마를 향한 분노나 원망들이 가시 돋친 말투로 쏟아져 나왔다. 그날 나는 내가 얼마나 악한지를 비로소 알았다. 살인을 하고 9시 뉴스에 나오는 그들처럼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맘이 바로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는 사람이 무서웠다. 그리고 나 자신을 곰곰이 돌아보았다.
‘엄마가 우리 남매를 두고 갔다는 이유만으로 오랜만에 보는 엄마를 내가 죄인 취급하고 있구나. 나도 나 혼자 살겠다고 자식을 버려두고 집을 나왔는데…. 그러면 난 뭐지?’
내 마음은 수시로 바뀌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내일은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잠이 들다가도 아침이 되면 또 건축 현장에 가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하나님이 내 영혼을 사랑하셔서 나를 붙들고 계셨다는 마음이 든다.
봉사하면서 예배와 모임에 계속 참석해 말씀을 들었는데, 어느 순간 하나님의 말씀에 내 모습이 비쳐졌다. 나는 참으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였다. 자신을 믿고 아버지를 떠났지만 결국엔 돼지우리에서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하고 죽음 앞에 서 있었던 탕자의 모습, 그 모습이 딱 내 모습이었다. 그리고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수가 성의 여인 또한 내 모습이었다. 내게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늘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있어서 고통스러웠다. 강도 만난 자, 간음 중에 잡힌 여자, 38년 된 병자…. 그동안 그냥 이야기로만 들었던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날은 전부 나의 모습이 되었고, 그들의 이야기는 전부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성경 말씀이 믿어졌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찾아가셨던 것처럼 나에게도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내가 살았던 지난 날들은 하나님이 나를 찾으시려고 허락하신 일이라고 믿어졌다. 정말 멋지게 살고 싶었지만 어둡기만 한 인생을 살았는데, 하나님은 나를 그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당신이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셨다. 추하고 악한 나를 예수님이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로 말미암아 나는 거룩함을 얻었다. 목사님과 사모님이 전에 이야기해 주었던 이 모든 말씀들이 한순간에 믿어졌다. 마치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내 마음이 말씀을 흡수하는 것 같았다. 수고한 것 없이, 아무 값없이 그저 은혜로 ‘죄 사함’이라는 선물을 덜컥 받았다. 그날이 2013년 8월 28일이었다.
내 마음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가 임했다. 나는 구원받는 것이 내가 뭔가를 하고, 어떤 느낌이 확 와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것도 한 것 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졌을 뿐인데, 은혜로 구원을 받아 내 마음으로는 천국에서 살고 있다.

 
오늘도 행복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구원받은 후, 나는 예배당 공사 현장에 있는 컨테이너 방에서 생활하면서 봉사하고 있다. 정말 순식간에 일이 진행되었다. 내가 찾아온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의로운 오른손으로 날 붙잡아 주셨다는 말씀이 맞았다.
매일 새벽 5시 30분에 눈을 뜨면 먼저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 오늘 아침도 눈을 뜨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저를, 어쩌면 이미 죽었을 저를 주님이 구원해 주셔서 복음을 듣게 하시고 성도들이 모이는 이 아름다운 예배당을 짓는 곳에서 기쁨으로 봉사하게 하셨습니다.”
나는 큰 축복 속에서 살고 있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형제 자매들, 그리고 목사님 사모님과 하루 종일 함께 지내며, 저녁이면 기도회로 모여 늘 말씀을 듣는 복을 누리고 있다. 소주와 담배를 링거 삼아 의지하며 살았던 내가 그것들에서 멀어지니 자연히 건강도 좋아진다.
얼마 후면 예배당이 완공될 것이다. 그때 내 마음에는 내 안에서 일하신 예수님, 우리 안에서 일하신 예수님 한 분만이 남을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주님이 감사하다.
지금 나는 남편 앞에서, 내가 집을 떠나 엄마 없이 자라게 한 자식 앞에서 죄인이 되어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
오늘도 나는 예배당 건축 현장으로 간다. 그곳은 매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역사를 보여 주시는 감동의 현장이다. 주님이 주신 덤으로 사는 인생을 주님 앞에 봉사하며 살고 싶다고 기도한다. 이곳으로 나를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서 공사를 마치고도 나를 아름답게 이끄시겠다는 믿음이 있기에, 오늘도 나는 행복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