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 압곡동 ‘새터’에서의 어느 만남
50년 전 압곡동 ‘새터’에서의 어느 만남
  • 박민희 편집장
  • 승인 2014.01.27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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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를 찾아서

 
 
 
경남 합천군 봉산면 압곡리, 이름만 들어도 어느 깊은 산골 마을이 떠오른다. 50여 년 전,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다 마을 앞에 흐르는 개울물을 마시고 살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어디나 가난했던 시절이지만 압곡동 사람들은 유난히 가난을 느끼며 살았던 그때, 네 명의 젊은이가 압곡동 세 개 부락 중 가운데 마을인 ‘새터’를 찾아왔다. 선교사들이 세운 선교학교에서 신앙훈련을 받은, 스무 살 청년 박옥수와 그와 함께 훈련받은 젊은이들이었다.
1963년 봄에 마을을 찾아온 청년들은 몇 달간 마을의 재실(齋室)에서 지냈고, 재실 바로 옆집에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서른 살의 백우현(현재 80세)과 그의 아내 박필남(현재 76세)이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었다. 50년의 세월이 흘러,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두 사람을 만나러 압곡동으로 향했다. 흙먼지 날리던 옛 길과 초가 지붕들은 사라졌지만, 압곡동은 아직도 깊은 산골 마을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깔끔하게 단장된 백 형제님 댁에 들어서니, 두 분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손님이 온다고 보일러를 세게 틀어두어 훈훈한 거실에 앉아 두 분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 속으로 여행을 떠났다.

“아버님, 재실에 있는 학생들이 사나흘째 굶고 있습니다.”
박 자매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사람이 우리 마을을 찾아왔을 때는 보리 흉년이 들어 무척 어려웠던 해였어요. 네 사람이 이장님을 찾아가 마을에 머물게 해달라고 부탁했지요. 이장님이 우리 집안 아저씨였는데, 청년들이니까 농사일에 도움이 될까 해서 집에 받으셨다가 며칠 지내 보니 그렇지 못한 것을 알고 집에서 나가게 했어요. 그런데 청년들이 부탁해서 마을 재실에서 지내게 됐지요. 시아버지가 마을 어른이어서 허락하셨어요. 중간에 두 사람이 떠나고, 한 사람도 가을 무렵에 떠나 나중에는 박 목사님 혼자 있었지요.”

 
당시 새댁이었던 박 자매님이 도랑에 물을 뜨러 가려고 문밖을 나서면 재실이 바로 눈에 들어오는데, 며칠째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고 있었다.
“그때는 굴뚝에서 연기가 나야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때잖아요. 그런데 사나흘이 지났는데도 불을 피우질 않아요. 당시에는 구걸하면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많았기에 고학생들인 줄 알았어요. ‘저러다가 학생들이 굶어죽겠다’는 마음이 들었지요. 무얼 가져다주고 싶지만 어른들이 계시잖아요. 그리고 시집살이가 엄한 때인데, 외간 남자잖아요. 안타까운 마음만 가지고 있는데, 마침 이장 아저씨가 집에 놀러오셨어요. 점심은 감자를 먹던 때였기에 감자를 삶으면서 ‘저 학생들 한 그릇 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감자를 더 삶았어요. 삶은 감자를 어른들께 가져다 드리고 옆에 앉아 있으니까 아저씨가 ‘이 사람아, 볼일 있으면 나게 보게’ 하셔요. ‘예’ 하고 계속 앉아 있으니까 아버님이 ‘나한테 할 말 있나? 할 말 있으면 해봐라’ 하셔요. 학생들에게 감자를 가져다주고 싶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혼날까봐 내려가고, 올라왔다가 내려가길 몇 번 반복하다가 어떻게 말이 튀어나왔어요.”
“아버님, 재실에 있는 학생들이 사나흘째 굶고 있습니다.”
“아니, 굶다니? 그러면 되는가? 감자 한 그릇 갖다 줘라.”
새댁은 기뻐서 큰 그릇에 감자를 담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에는 물그릇을 들고 잰걸음으로 재실로 갔다. “가서 보니까 네 사람이 마루에서 벽에 기대앉아 성경을 읽고 있었어요. 그때 나는 성경도 모르고, 청년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도 몰랐지요.”
그 후로도 재실 굴뚝에서는 좀처럼 연기가 올라오지 않았고, 옆집 사람들은 늘 안쓰러움을 느껴야 했다.
“나중에 박 목사님이 하시는 이야기를 듣고 알았는데, 며느리는 시어머니 몰래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시어머니는 며느리 몰래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다고 해요. 하지만 얼마나 주었겠어요? 우리도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었는데요. 청년들이 보리쌀에 감자와 콩깻묵 같은 것을 넣어서 죽을 쑤어 먹는 것을 몇 번 보았는데, 사람이 먹기엔 험한 음식이었지요. 그렇게 먹는 것도 몇 번 본 게 전부예요. 도와주지는 못하고 안타까우니까, 그렇게 살지 말고 어디 가서 먹을 것을 구해 와서 음식을 해먹으라고 많이 이야기했지요.”
옆에서 듣던 백 형제님이 이야기를 덧붙였다.
 “박 목사님과 내가 열 살 차이인데, 그때 학생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 내가 왜 그렇게 고생하냐고 물으니 ‘하나님이 먹을 것을 주셔서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해요. 그런데 내 눈으로는 재실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여름이 되니까 산에 열매 등 먹을 게 많아 산에 올라가서 배를 채웠다고 해요. 그때 박 목사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고 하시지요. 하나님 아니고는 도울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밥 먹을 일이 없어서 성경을 많이 보았다고도 하시고요.”

 
“그곳에서 지금은 하늘나라에 있는 손을순 자매님이 구원받았어요.”
1963년 가을, 압곡동 재실에는 청년 박옥수를 비롯해 두 사람이 있었다. 옆집에서는 두 청년이 어떻게 겨울을 날지 걱정이었는데, 하루는 아랫마을 ‘압실’(압곡1구)에서 사람들이 두 청년을 찾아왔다. 마을 청년 하나가 군대에서 운전병으로 있다가 교통사고로 죽어 시신이 왔는데, 동네 법에는 마을 밖에서 죽은 사람을 마을로 들일 수 없기에 마을 어귀에 두고 장례 문제를 의논하다가 ‘새터에 교회 전도사님이 있다더라’ 하고 장례를 주관해 달라고 부탁하러 온 것이다. 그날 두 사람은 모처럼 배부르게 음식을 먹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두 사람은 압실로 거처를 옮겼고, 곧 한 사람도 떠나 박옥수 전도사만 압실에 남아 지냈다.
백 형제님이 당시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박 목사님이 재실 뒤에 교회를 세우려고 했는데, 동네 어른들이 반대해서 못 세웠다고 해요. 그때 길이 생겨서 압실로 갔고, 그곳에서 지금은 하늘나라에 있는 손을순 자매님이 구원받았어요. 목사님을 통해서 구원받은 첫 열매지요. 손 자매님은 압실에서 5리가 조금 안 되는 ‘권빈’이라는 동네에 살며 행상을 했는데, 박 목사님이 거했던 집의 주인이 손 자매님 친구여서 찾아갔다가 구원받은 거지요. 자매님은 우리 집에도 자주 들렀기에 우리와는 잘 아는 사이였어요.”

 
 
그 후 박옥수 전도사는 하나님의 인도로 압곡동을 떠나 거창 장팔리에 있는 교회로 갔고, 행상을 나갔다가 돌아온 손을순 자매는 박 전도사가 거하던 집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는 낙망한다. 그리고 박 전도사가 거창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거창 장날에 무작정 박 전도사를 찾아나섰다.

 
이후 손을순 자매는 자신의 집에서 아이들을 모아 성경공부를 시작했고, 사람들이 하나 둘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50리 길을 걸어서 인사하러 온 거예요.”
새터에 살던 젊은 부부와 청년 박옥수와의 만남은 박 전도사가 압실로 가면서 끊어졌다. 그리고 어느 날, 박 전도사가 새터를 찾아왔다. 박 자매님의 이야기다.
“목사님이 압실로 가면서 우리는 사느라 바빠서 잊고 지냈어요. 나중에 알았지만, 목사님은 다시 거창 장팔리에 있는 교회로 가셨고요. 그리고 1년이 조금 지나서 목사님이 우리 집을 찾아오셨어요. 군대에 간다고, 장팔리에서 50리 길을 걸어서 인사하러 온 거예요. 군대에 가서도 몇 차례 편지를 보냈어요. 아주머니, 아저씨 잘 계시냐고 묻고, 끝에는 항상 하나님 앞에 감사하다고 썼지요. 우리는 답장을 못 했어요.”

“우리 아이들은 복음을 위하는 복된 삶을 살고 있고요.”
백 형제님 가정에 복음이 들어온 것은 10여 년이 흐른 후였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둘째 딸 백명순 양이 손을순 자매님이 인도하던 교회에 나가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이어서 중학생이던 맏딸 백명옥(현 광주제일교회 장영철 목사 사모) 양이 구원을 받았다. 몇 년 후에는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백승동(현 기쁜소식제주교회 목사) 군이 구원을 받았다. 백 형제님 부부는 맏딸이 1987년에 결혼하면서 교회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박 자매님이 자신이 구원받기 전의 일들을 풀어 놓았다.

 
“아이들이 구원받고 교회에 다녔는데, 나는 교회는 다 똑같은 줄 알았어요. 교회에 다니면 착하게 산다고 생각했기에 반대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두 딸이 고등학교를 거창으로 가 자취하면서 교회에 가느라 집에 잘 오지 않았어요. 당시 딸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학생들 가운데 지금 목회자 사모가 된 사람이 제법 많지요.”
박 자매님은 지금은 행복하지만 당시에는 딸들에게 섭섭한 게 많았다며, 특별히 마음이 아팠던 이야기를 슬그머니 꺼냈다.
“딸들이 스무 살 갓 넘었을 때, 손이 통통한 게 예뻐서 반지를 끼워주고 싶었어요. 돈을 한 푼 두 푼 모아 여름에 금 한 돈씩으로 반지를 만들어서 손가락에 끼워 주었지요. 그때 내가 아이들에게 ‘나도 여자라서 이런 것 하고 싶지만 너희들 손에 끼워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절대로 없애지 말고, 나중에 시집가면 팔아서 신랑 넥타이핀을 해주거라.’ 하고 말했어요. 그런데 추석에 와서는 자꾸 손을 뒤로 숨겨요. 왜 그러는지 모르고 있다가 반지가 안 보이길래 물으니까 손에 물집이 생겨서 두고 왔다고 해요.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물으니까 헌금했다는 거예요. 굉장히 속상했지요.”
딸들은 계속 어머니의 바람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내 친정이 부산인데, 애들 외삼촌이 큰딸을 부산에 있는 좋은 직장에 들어가게 해주었어요. 둘째도 좋은 직장을 잡았고요. 딸들에게 교회는 다니지만 직장은 절대로 버리지 말라고 했는데, 큰딸이 직장을 그만두고 교회 사택에 들어갔어요. 기가 막혔지요. 농촌에서 없는 가운데 4남매를 고등학교라도 시키려고 하니까 너무 어려웠기에, 시집갈 돈이라도 벌었으면 했는데…. 그런데 큰딸이 장영철 전도사와 결혼하고 나서 작은딸이 또 박 목사님 사택에 들어갔어요. 많이 미웠지요. 아들에게 ‘너도 교회에 다니면 나 죽어불란다’ 했는데, 아들도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더니 결국엔 목회자의 길을 가더라고요.”
박 자매님은 큰딸이 해산한 후, 뒷바라지를 해주러 갔다가 딸 내외의 강권으로 남편과 함께 수양회에 참석해서 구원을 받았다.
“수양회 때 복음을 듣고 내 죄가 씻어졌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다지 크게 여겨지진 않았어요. 그런데 수양회 마지막 날 저녁에 강사였던 박 목사님이 우리 이야기를 해요. ‘내가 처음 압곡동에 복음을 전하러 갔을 때는 아리따운 색시였는데, 지금은 할머니가 되고 할아버지가 되었다’며 눈물을 보였어요. 그때는 목사님이 왜 그렇게 감격스러워하시는지 몰랐어요. 다만 우리를 많이 생각해 주시는 게 고마웠지요.”
이야기를 듣던 백 형제님이 덧붙였다.
 
“우리는 청년 때 만난 목사님을 그냥 지나가는 학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목사님 마음에는 우리가 주었던 작은 도움이 크게 남았던 것 같아요. 압곡동에 있을 때도 추수 때면 벼도 베어 주고 우리 집 일을 제법 도와주었지요. 이웃에 있다 보니 다른 집 사람들보다 우리하고 유난히 가까웠어요.”
구원받고 시부모님 눈치를 보며 몰래 교회에 다녔다는 박 자매님. 어려움도 많았지만 압곡동교회에서 성도들과 함께 주님을 섬겼는데, 성도들이 나이가 들어 하나 둘 주님 품으로 돌아가고 젊은 사람들은 도시로 나가 압곡동교회는 자연스럽게 사라져버렸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박 자매님은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청년 때 박 목사님은 많이 야위었지요. 옷도 좋지 않았고요. 그때는 어렵게만 보였는데, 하나님이 이곳에서 목사님을 연단하셔서 당신의 귀한 종으로 삼으셨잖아요. 우리는 목사님이 재실에 지내는 바람에 이웃이 되었는데, 그것 때문에 구원받고 하나님을 아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고요.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복음을 위하는 복된 삶을 살고 있고요. 감사하지요. 어려운 일을 만나기도 하지만 지금은 걱정이 없고 행복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하게 인도하실 것이니까요.”

 
백 형제님 부부와 이야기를 마치고 아직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재실을 둘러보았다. 시간이 거꾸로 흘러, 재실에는 청년들이 벽에 기대앉아 성경을 보고 있고 새댁은 감자가 담긴 그릇을 들고 기뻐하며 재실 마당으로 잰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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