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냉의 선교사가 되기까지
베냉의 선교사가 되기까지
  • 김광운 (베냉 선교사)
  • 승인 2014.01.27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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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수기

 

나의 어린 시절
나는 전남 고흥의 시골 마을에서 3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소아마비를 앓아 어머니는 나를 치료하려고 업고 여기저기 찾아다니셨다. 마침내 좋은 의사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의사 선생 님은 어머니에게 “주사를 두 번 맞아야 합니다” 하고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한 번만 가고 두 번째는 가
 
지 못하셨다고 한다. 그런 까닭인지 나는 나를 감추는 내성적인 성격을 가진 아이로 자라났다. 아버지는 우리를 아주 엄하게 다스리셨다. 어릴 때 나는 잘 울었는데, 한번 울면 아주 오랫동안 울어서 아버지가 나를 창고에 가두어버리곤 하셨다.
아버지는 자식을 잘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해 나를 초등학교 6학년 때 광주로 전학시키셨다. 나는 고모 집에서 지내며 학교를 다녔다. 내 마음에는 항상 어머니가 해주신 따뜻한 밥을 먹고 어머니 곁에서 지내며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리고 공부를 잘해 보겠다는 마음은 간절했지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노력은 하지만 항상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그때 나는 공부는 머리를 타고나야 잘할 수 있는 것이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성 간염
중·고등학교를 광주에서 마치고 대학은 전북 익산에 있는 원광대학교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선배들이 이야기하기를 나중에 좋은 직장에 취직하려면 영어를 잘해야 한다고 해서 영어를 배우려고 애썼다. 하루는 어느 선배가 ‘영어는 미국 사람에게 직접 배우는 게 최고인데, 미국 사람들이 직접 가르치는 데가 있으니 가보자’고 하였다. 가서 보니 안식일 교회에서 운영하는 ‘삼육영어학원’이었다. 자연스럽게 안식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어를 배우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지 신앙에는 관심이 없었다. 군산비행장이 익산 가까이에 있어서 자주 군산에 가서 미군들과 사귀면서 대학 시절을 보냈다.
3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다. 하루는 몸이 너무 피곤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의사 선생님이 “당신은 간염에 걸렸으니 당장 치료해야 한다”며 입원하라고 하였다.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지만 몸은 좋아지지 않았다. 여러 병원을 옮겨다녔지만 호전되지 않아 결국 대학병원에 입원해서 정밀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만성간염이었다.
대학병원에서 퇴원한 후에도 몸이 좋아지지 않아 기도원이나 금식원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지내면서 ‘병이 왜 왔는지?’를 생각하다가 교회에서 ‘죄 때문에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기억났다. 그때부터는 기도가 달라졌다. 전에는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했지만, 이제는 죄를 씻어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다시는 이 교회에 오지 말아야지!’
교회에 다녔지만 하나님을 진지하게 찾아본 적이 없었는데, 병 때문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었다.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하루는 새벽 4시에 새벽 기도회에 참석했는데, 목사님이 짤막하게 성경 이야기를 한 후 나에게 다가와 “젊은이, 죄가 많구먼. 죄를 씻어야 해. 열심히 회개해야 돼” 하고 가셨다. 깜짝 놀랐다. ‘나를 알지도 못하는 목사님이 내가 죄가 있는지 어떻게 알지? 그런데 회개하라고? 나는 그렇게 많이 회개해도 죄가 씻어지지 않는데….’ 어쨌든 병이 나으려면 죄가 사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4학년으로 복학했지만 몸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1년만 지나면 졸업장을 받으니 수업에 거의 참석하지 않고 어떻게든 1년을 때우려고 했다. 어느 날 병원에 가려고 집을 나섰는데, 일요일이었다. 일요일인지도 모르고 집을 나선 것이다. 나온 김에 병원 가까운 곳에 교회가 있으면 예배를 드리고 가자고 생각했다. 두리번두리번 교회를 찾아보니 병원 옆 2층에 ‘이리은혜교회(현 익산은혜교회의 이전 예배당)’가 있어서 들어갔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어느 성도 분이 다가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가면 좋겠다고 했다.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생은 교회에 다녀요?”
“예.”
“천국에는 죄인이 갑니까, 의인이 갑니까?”
“당연히 의인이 가지요.”
“학생은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죄인이지요.”
“그러면 학생은 죽으면 어디에 가지요?”
“나는 교회에 다니니까 당연히 천국에 가지요.”
대답하고 나서 생각해 보니 내가 하는 말이 이상했다. 죄인이라고 하면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대답했으니….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몸이 좋지 않았기에 몹시 힘들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다시는 이 교회에 오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나는 성경 말씀을 택하기로 했다
어느 날, 이리은혜교회에 다니는 분이 내가 살던 집을 어떻게 알았는지 찾아와서 ‘전주에서 대전도집회가 있는데, 가보지 않겠냐?’고 했다. ‘버스를 빌려서 가니 함께 가보자’고 했다.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하도 이야기하기에 따라가 보았다. 하지만 집회에 참석해서 말씀은 하나도 듣지 않고 잠만 쿨쿨 자고 왔다. 둘째 날도 참석했고, 그날도 역시 잠을 잤다. 그런데 한참 자다가 깨보니 강사 목사님이 소리를 지르며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많은 목사님들이 ‘원죄는 예수님이 사하셨지만 자범죄는 우리가 회개해서 씻어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그런 이야기가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목사님은 그런 말씀이 성경에 있으면 보여 달라며, 만약 보여 주면 백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 나는 누가 나가서 그 말씀을 보여 줄지 눈여겨보았다. 나도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자 목사님은 시편 103편을 펴보라고 하더니 3절 말씀을 읽었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시 103:3)
그러고는 볼펜으로 ‘모든’이라는 단어에 밑줄을 그으라고 했다. 성경 말씀은 내가 배우고 알고 있던 것과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
‘아! 예수님이 우리 원죄만 사하신 것이 아니구나! 모든 죄를 사했다고 하시는구나!’
많은 목사님들이 가르치는 것이 진리인가, 성경 말씀이 진리인가를 생각했다. 나는 성경 말씀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때 내 모든 죄가 사해졌다는 사실이 마음에 믿어지면서 죄에서 해방을 받았다.

필리핀에서 온 두 사람
구원받으니 죄에서도 자유로웠지만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욕망에서도 자유로워졌다. 마음에 참된 쉼이 찾아왔다. 몸도 많이 좋아졌다. 대학교를 졸업하고는 예배당에서 생활했다. 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지내는 것이 즐거웠다.
하루는 목사님께서 직장을 한번 알아 보라고 하셨다. 직장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결국 교회의 한 형제가 다니던 염색공장에 같이 다니기 시작했다. 큰 천을 표백하는 공장인데, 큰 탱크에 화학약품을 넣어서 천을 표백하는 일을 했다. 탱크에서 약품을 끓이는 동안에는 냄새가 너무 지독해서 탱크 옆에 있으면 숨쉬기가 곤란해 밖에 나가 있어야 했다. 밖에 나가면 다른 파트에서 일하던 필리핀에서 온 두 사람도 냄새 때문에 밖에 나와 있을 때가 많았다.
그들은 필리핀에서 중개인에게 돈을 많이 주고 불법으로 한국에 돈을 벌러 온 사람들로, 한 사람은 50이 넘었고 한 사람은 열여덟 살이었다. 두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다. 50대 아저씨는 눈을 부릅뜨고 화를 내면서 다시는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지만, 젊은 친구는 성경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여 구원을 받고 우리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얼마 후, 국가의 단속이 있어서 두 사람은 필리핀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한국에 온 지 6개월이 채 되기 전이었다. 50대 아저씨는 돈을 얼마 벌지 못해 돌아가면 빚더미에 앉을 것을 생각하면서 걱정이 가득했다. 구원받은 형제에게도 아내와 아이가 있었지만, 형제는 “돈보다 더 큰 하나님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 복음을 내 아내와 친구들에게 전해주겠습니다” 하며 기뻐하면서 돌아갔다.
‘똑같은 필리핀 사람이지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다르구나!’
구원받고 처음으로 복음의 능력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복음 전도자의 길로
구원받고 4년이 지난 후, 복음 전도자가 되기 위해 선교학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가자마자 아내가 아이를 유산하고, 신앙훈련을 받으면서도 어려움을 많이 만났다. 아내와 자주 다투고, 나를 통해서 구원받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수업시간에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마음에까지 들리지는 않았다. 모든 것이 힘들고 어렵기만 했다. 아내는 코에 종양이 있어서 항상 코가 ‘찍찍’ 했다.
1년이 지나 함께 훈련받은 동기들은 각 교회로 파송을 받았지만 나는 그 안에 들지 못했다. 다시 2개월이 지난 후, 우리를 훈련한 박옥수 목사님이 부르시더니 “다른 사람들은 병이 있어도 선교학교에 들어오면 낫는데, 자네 아내는 왜 지금까지 안 낫는가?” 하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아무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갈 곳이 없어서 “목사님, 여기 대전에서 살면 안 되겠습니까?” 하고 말씀드렸다.
목사님의 허락을 받아 조그마한 월세집을 얻어서 생활했다. 막노동판에 따라다니며 하루하루 품삯을 받아 살면서 저녁에는 교회 모임에 참석했다. 처음 해보는 막노동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이상하게 내 손에서 성경이 떠나지 않았다. 늘 성경을 가지고 다니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읽었다.
하루는 성경을 보다가 정말 부담스러운 말씀이 내 마음에 와 닿았다. 그 말씀 앞에서 말씀과 다른 내 마음을 도저히 꺾을 수 없었다. 교회에서 마음을 꺾으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꺾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스스로 나를 꺾을 수 없었다. 그 후,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아각을 죽이라고 했을 때 사울은 아각을 죽일 수 없었고 사무엘이 죽였던 것처럼, 내가 나를 꺾지 못하고 하나님이 내 마음을 꺾게 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말씀 앞에서 내 마음이 한번 꺾이니까 마음에 큰 쉼이 찾아오고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박옥수 목사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선교학교에 다시 들어오라고 하셨다.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선교학교에 들어가서 한 달 가량 지냈을 즈음 대구의 하양교회로 파송을 받았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사랑
하나님의 큰 은혜에 감사하며 하양으로 가서 몇 안 되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2년을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파송 공문에 내가 독일 괴팅겐으로 간다고 되어 있었다. 다시 선교학교로 가서 독일 비자를 비롯해 이

 
것저것 준비하고 있는데, 아침 식사 시간에 박 목사님이 나를 자주 책망하셨다. 아침에 목사님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선교학생들이 식사하는 식당에 내려가서 밥을 먹었다.
선교하러 가려다가 취소되어 선교학교에서 또 훈련을 받게 되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나?’ 나는 세상에서도 그랬지만 교회 안에서도 뭐 하나 잘 풀리는 게 없었다. 선교학교에서 보낸 지 1년이 다 되어갈 무렵, 박 목사님이 나에게 가나에 있는 선교사님 곁에서 신앙생활을 하라고 하셨다.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아무 쓸모없는 사람에게 복음을 위해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과 교회가 너무 감사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했지만 그런 베드로를 버리지 않고 다시 찾아가신 예수님! 정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나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나를 인도하신 목사님을 통해서 볼 수 있었다.

정글에 사는 ‘아사모아’ 집으로
가나에서 아프리카 사람들과 지내는 것이 무척 즐겁고 감사했다. 못난 나에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주신 하나님이 말할 수 없이 감사했다. 그런데 아내는 아프리카에서 지내는 것을 몹시 힘들어했다.
어느 날, 가나 선교사님께서 정글에 전도여행을 다녀오라고 하셨다. 거기에 가면 ‘아사모아’라는 구원받은 형제가 있는데, 그 집에 가서 지내며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 아내는 가기 싫어서 투덜거리며 짐을 챙겼다. 가나의 수도 테마를 출발하여 쿠마시에 가서 그곳에 있는 우리 교회에서 잠을 자고, 아침 일찍 정글로 떠났다. 차가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곳에 이르러 차에서 내린 후, 한 어린이에게 우리를 아사모아 집까지 인도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따라오라고 했다. 숲이 우거진 조그마한 오솔길을 한참 걸었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하니 아사모아 형제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정글 안에 흙으로 만든 집, 그곳에서 아사모아는 아들과 지내고 있었다. 아내는 친정에 갔다고 했다. 원래는 하루에 두 끼만 먹는데, 우리가 왔다고 세 끼를 주었다. 나중에는 우리도 두 끼씩만 먹었다.
아사모아는 코코아 농사를 했는데, 바쁘지만 우리를 이웃들에게 데려다 주며 복음을 전하라고 했다. 집이 띄엄띄엄 있어서 어떤 집은 가는 데 시간이 꽤 걸리기도 했다. 때로는 밤에도 호롱불을 들고 다니며 집들을 방문했는데, 좁은 길을 걷다 보면 금방이라도 뱀이나 짐승이 나타날 것 같았다.
공기 좋은 곳에서 지내는 것이 좋았지만 물은 몹시 좋지 않았다. 그곳 사람들은 도랑물을 길러서 먹거나 빗물을 받아서 먹었다. 한번은 나도 갈증이 몹시 심해서 도랑물을 마셨다가 며칠 동안 설사를 했다.
하루는 햇볕이 쨍쨍 쬐는데, 자꾸 햇빛을 찾았다. 몸에 찬 기운이 돌았다. 심한 말라리아로 결국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병원도 없고 약도 구하기 힘든 그 정글에서 꼭 죽을 것만 같았다. 아사모아 형제가 자전거를 구해 와서 나를 태우더니 잡고 뛰기 시작했다. 길이 좁아서 타고 달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꽤 오랜 시간을 달려서 병원에 도착해 주사를 맞고 잠이 들었다. 세 시간쯤 후에 깨보니 좀 살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이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런 정글 지역에도 말라리아를 치료해 주는 의사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아프리카에서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고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저 파파야 나무는 내 것이고, 저쪽에 있는 파파야는 내 아내 것입니다.”
하루는 아사모아 형제와 어느 집에 가서 말씀을 전했다. 그 집 부부가 말씀을 정말 잘 듣고 고마워했다. 이야기를 마치고 아사모아 집으로 돌아오자 그 부부가 아이 편으로 큰 닭 한 마리를 보냈다. 닭을 잡으면서 아사모아 형제는 “우리 집에 닭이 많이 있지만 내 것은 없고 전부 아내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파파야 나무를 가리키면서 “저 파파야 나무는 내 것이고, 저쪽에 있는 파파야는 내 아내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플란틴 나무도 형제의 것이 있고, 아내의 것이 있었다.
‘부부가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 남편 것이 아내 것이고 아내 것이 남편 것인데 왜 그렇게 나누고 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내 아내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아내는 나와 결혼해 살면서 어떤 것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내 것, 네 것을 나누고 있고, 하나님 앞에서도 그렇게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정글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한국에서 그들과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삶을 살았지만 전혀 감사하면서 살지 않은 자신도 보게 되었다.
정글에서 돌아온 후, 아내는 그곳에서 지낸 일과 마음에서 느꼈던 점들을 편지로 써서 박옥수 목사님께 보냈다. 목사님은 굉장히 기뻐하셨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베냉에 교회가 개척되었고, 2001년 2월에 우리 부부가 베냉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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