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삶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지금 이 삶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 박민희 편집장
  • 승인 2015.03.03 10: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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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성도를 찾아서_이은재 사모(브라질 상파울루 교회)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선교하고 있는 김범섭 선교사의 아내 이은재 사모. 스무 살에 구원받아 당시 대구중앙교회에서 주님을 섬기던 청년 자매들을 뒤따라 교회 안에서 복된 시간을 보냈다. 누구보다 부족했기에 부끄러운 마음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당신의 품에 안고 믿음의 세계로 한 걸음 한 걸음 이끄셨고, 지금은 “제가 어디서 이렇게 행복하겠어요?”라고 말하는 행복한 삶을 살게 하셨다.

“다시는 안 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는데, 또 갔어요”
1981년 겨울, 제일모직에 다니던 열아홉 살의 이은재는 친구의 손에 이끌려 대구중앙교회(기쁜소식대구교회의 전신)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난생처음 가는 교회였다. 무엇이 그의 발걸음을 교회로 이끌었을까? 
 “저는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학교 서무실에 근무하셨는데, 생활이 넉넉지는 않았어요.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오빠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고 동생들도 있어 집에서 저에게까지 관심을 가질 여력이 안 되었어요. 당시 불투명한 내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마음이 힘들었지만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때 한 친구가 ‘교회에 한번 안 가볼래?’ 했어요. 전에는 교회에 관심이 전혀 없었지만 그때는 마음이 굉장히 어려워서 교회에 가면 뭐라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주일 예배에 참석했어요. 하지만 박옥수 목사님이 우리말로 설교하시는데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어요.”
 예배를 마치고 이은재는 어느 선교학생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이은재에게 죄가 있느냐고 물었고, 그렇다고 대답하자 죄가 있으면 지옥에 간다고 했다. 이은재의 마음 밑바닥 깊은 곳에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갔어요. 하루는 절에 그려진 지옥 그림을 보고 몹시 두려워 지옥에 가지 않으려고 착하게 살려고 했어요. 그 후로 두려움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마음 한편에는 늘 지옥에 갈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어요.”
 자연스레 선교학생이 들려주는 성경 이야기에 마음이 쏟아졌다. 그런데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성경 말씀은 아주 달랐다. 죄가 많은 사람은 지옥에 가고 죄가 적은 사람은 천국에 간다고 생각했는데, 성경은 죄가 있는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말했다. 그리고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성경은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고 말했다.
 “제가 절에 다니면서 배웠던 것과 성경 말씀이 굉장히 달라서 다시는 안 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는데, 또 교회에 갔어요.”
 1982년 1월 어느 날, 예배를 마치고 이은재는 한 선교학생이 전해주는 마태복음 5장 말씀을 들었다.
 “거기에 보면 형제에게 ‘라가’라고 욕하는 자도, 또 마음으로 죄를 지어도 결국 심판을 받잖아요. 그 말씀이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제 생각을 깨뜨려 주었어요. 그리고 복음을 들었어요. 예수님이 내 죄를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서 내 죄를 다 씻으신 사실이 믿어졌어요. 교회에 다니거나 성경을 본 적이 없는데, 신기하게 성경 말씀이 마음에 그대로 들어왔어요.”

루디아처럼 살았던 청년 자매들
구원받은 후, 이은재 자매는 다니던 제일모직에서 나와 출판사에 취직해 책을 인쇄할 때 사용되던 ‘사식(寫植, 사진 식자)’ 기술을 배웠다. 전보다 월급을 배나 받는 기술이었다.
 “원래 신앙심도 없고 열심도 없었지만, 감사하게 교회가 우리 집과 가까워서 교회에 계속 갈 수 있었어요. 제일모직에서 함께 일했던 홍춘희 자매님이나 같은 또래였던 조정숙 자매 등이 제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많이 챙겨 주고 이끌어 주었어요.”
 이은재 자매가 구원받았을 당시 대구중앙교회 청년 자매들의 신앙 열정은 대단했다. 청년 자매들의 모임을 ‘루디아’라고 불렀는데, 마게도냐에서 처음 구원받아 사도 바울을 뒷받침한 여인 루디아에게서 따온 이름으로, 복음의 일을 뒷받침하는 여인들이라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던 청년 자매들이 힘을 다해 복음을 섬겼어요. 그때는 매일 교회에서 모임이 있었지요. 일주일에 한 번씩 철야기도를 했고요. 제가 보기에는, 식비와 차비 외에는 월급을 거의 다 복음을 위해 드리는 것 같았어요. 아가씨들이 교회에 찾아오면 자매들이 신앙상담을 했고요. 우리 교회를 거짓으로 비방하는 소리도 많아 집에서 핍박도 엄청나게 받았어요. 자매들이 그 모든 것을 이기고 복음을 위해 힘있게 살았어요. 대학생들도 구원받아 루디아 모임에 하나 둘 더해졌는데, 지금 선교하고 있는 김애자•장명숙•김정숙 사모님 등이 당시 구원받아 힘있게 복음을 전했어요.”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며 살았던 청년 자매들에 비해 신앙이 형편없었다는 이은재 자매. 출판사에서 근무하다 보니 일이 몰려 야근할 때가 많아 주일 예배 외에는 수요일과 금요일 정도 교회에 갔다고 한다. 철야기도 모임에 빠질 때도 많았고. 그래서 자신이 루디아 모임에서 가장 부족한 자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선교학생들도, 청년 자매들도 차비를 위해 기도하고 양식을 위해 기도하던 때였어요. 어려운 형편 중에 하나님이 도우신 간증들이 많았어요. 저는 그렇게 살지 않았어요. 제 월급이 제법 많기도 했지만, 저는 제가 먹고 입는 데 필요한 돈을 쓰고 나머지를 복음을 위해 드렸어요. 그래도 월급의 반 이상을 드리긴 했지요. 그래서 그런 간증들을 들으면 ‘저분들은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청년 자매들은 다 복음 전도자의 아내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컸는데, 귀하게 보이고 부럽기도 했지만 저는 그 길이 너무 힘들어 보여서 그런 마음을 조금도 갖지 않았어요.”
 이은재 자매가 구원받고 1년이 되었을 때 어느 자매가 편지를 건넸다. 거기에는 ‘나는 네가 구원받고 얼마 가지 않아 교회를 떠날 것 같았는데,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게 정말 신기하다. 하나님이 너를 붙드신 것 같다’라고 적혀 있었다.
 “하나님과 교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겠다는 두려운 마음이 있었어요. 교회에 있다 보니 누구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지만 당연히 십일조를 해야 하는 것으로 느꼈고, 집회를 하거나 교회를 개척하는 등 복음을 위한 일들이 있을 때면 당연히 작정헌금을 해야 하는 줄 알았어요.”
 직장 일에 매여 얼마 동안 교회를 나가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때 날개가 있으면서 기어다니는 곤충은 가증하다는 레위기 11장 말씀이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자신의 모습이 그 가증한 곤충의 모습과 같아 두려워서 믿음으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그 전에는 밤에도 일해야 해서 교회에 가지 못했는데, 그 후로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아침에 2시간 일찍 출근해 저녁에 할 일을 미리 했어요. 그리고 저녁에는 교회에 갔지요. 그래도 다른 청년 자매들을 따라갈 수 없었지만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헌신적으로 살았던 당시의 성도들. 무엇이 그렇게 살 수 있게 했는지 궁금했다.
 “복음이 마음에 굉장히 크게 자리 잡았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우리 교회가 외형이 초라했기에 우리가 전하는 성경 말씀 외에는 교회에서 믿을 만한 것이 없어 한 사람 구원받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구원받은 사람은 자신이 받은 구원이 그만큼 소중하게 여겨졌지요. 전반적으로 가난했던 시절이라 세상에 대한 소망도 없었던 것 같고요. 그리고 박옥수 목사님과 사모님이 어려운 형편 중에도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지 않고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려고 온 마음을 쏟으시는 모습을 보니까, 구원과 복음이 굉장히 소중하게 느껴졌지요. 자연히 목사님처럼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드리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이고요.”

연약한 내가 복음을 위해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동반자
이은재 자매가 스물 네 살이던 해에 그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그 해 겨울에 교회에서 어느 형제와 선을 보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라 깜짝 놀랐다. 당시 교회에는 청년 형제들에 비해 청년 자매들이 많았기에 나이 많은 자매들도 제법 되었다. 이 자매는 자신의 신앙 상태를 고려할 때 서른은 넘어야 결혼할 것이라고 여겼기에 결혼은 아예 생각도 않고 있었다.
 “당시에 처녀들은 제 나이 때 결혼을 많이 했기에 집에서 선을 보라고 많이 이야기했어요. 제법 괜찮은 데에서 중신도 들어오고요. 그렇지만 결혼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과 하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던 남자 직원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집에서는 좋은 남편이고 좋은 아빠지만 밖에서는 부정하게 사는 경우가 많았어요. 성경 말씀대로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악뿐이기에 그런 남자와 행복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이 분명했어요. 물론 구원받은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요.”
 1986년 12월, 이 자매는 당시 동대구교회의 청년회 회장이었던 김범섭 형제와 선을 본다. 그리고 이듬해 2월에 결혼한다. 당시 김범섭 형제는 복음을 위해 사는 신실한 형제였기에 그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은재 자매와 결혼하는 것에 주위에서 놀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왜 제가 남편과 결혼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스스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이기에 복음을 위해 살 수 있도록 동반자를 주셨다고 생각해요. 하나님이 저에게 열어 주신 길이라는 마음이 들어요.”
 결혼하기 전, 이은재 자매는 주례를 선 박옥수 목사로부터 김범섭 형제는 곧 선교학교에 들어오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가장 두렵게 여겼던 복음 전도자의 삶이 이 자매에게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결혼한 후의 삶은 이전과 많이 달랐다.
 “남편은 저와 다르게 살았어요. 저에게는 교회도 있지만 내 삶도 있었는데, 남편은 모든 것이 교회 중심이었어요. 퇴근할 때에도 교회에 들렀다가 왔어요. 그리고 전도를 많이 해서 자주 집에 사람을 데리고 왔어요. 같이 저녁을 먹은 후 교회에 함께 가려고요. 그렇게 사는 남편이 귀하게 보였어요. 그런 남편을 생각해서라도 내 마음이 하나님이나 교회와 멀어지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남편이 하는 일을 다 믿고 따랐고, 남편이 집에 데려오는 사람들에게 밥을 해주는 것이 기쁘고 즐거웠어요. 저는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두려웠던 선교학교로
1989년 초, 이은재 자매는 남편을 따라 선교학교에 입학한다. 그 전에, 결혼하고 남편을 좇아 복음을 위해 사는 삶이 행복했지만 선교학교에 가는 것은 여전히 두려웠다. ‘내가 그 길을 갈 수 있을까? 믿음으로 살 수 있을까? 하나님이 나를 도우실까?’ 등등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다.
 “선교학교에 가기 전에 하루는 교회 장년회 모임에 참석했어요. 당시 동대구교회에서는 장년회 때 장년들이 함께 저녁 식사를 했는데, 음식 준비하는 일을 도우러 갔어요. 그런데 젖병을 삶으려고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는 불을 안 끄고 간 거예요. 예배를 마치고 식사를 다 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쯤에야 그 생각이 났어요. 집에 불이 나고 난리가 났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 들어 살았기에 주인집에 전화를 했어요. 전화를 안 받으면 큰일이 터진 거라고 생각하면서요. 다행히 주인 할아버지가 받으셨어요. 제 이야기를 듣고 놀라서 우리 집에 가보니, 노란 냄비에 물이 아주 조금 남아 젖병이 눌어붙고 있는 상태에서 불이 꺼져 있더래요. 가스가 떨어진 거예요. 보통 가스통을 새 것으로 교체하면 두 달 정도 쓰는데, 한 달밖에 안 되었기에 이상했어요. 나중에 가스 배달원이 와서 검사해 보니 가스통 밸브가 깨져서 새나간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마음에 새겨지고, 그때 하나님이 제 마음에서 복음을 위해 사는 삶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 주셨어요.”
 선교학교에 입학한 후, 그동안 많은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했던 김범섭 형제를 통해 구원받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반대로 자주 실수해서 책망을 듣는 일이 많았다. 하나님은 그렇게 김 형제 부부의 마음을 무너뜨리셨다. 도구는 주인이 잡아서 써야 쓰임 받는 것임을 깊이 느끼는 시간이었다. 전도지로 파송받지 못할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은 이후 하나님의 은혜로 의정부에서 교회를 개척해 첫 목회를 시작했다. 목회를 시작한 후로는 하나님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많이 허락하셨다.

옛날 한국 교회의 성도들처럼 브라질 교회의 성도들도…
국내에서 몇 년간 사역한 후, 1998년 1월 김범섭 목사와 이은재 사모는 교회의 보냄을 받아 두 자녀와 함께 브라질로 떠난다.
 “브라질에 아는 사람도 없고, 공항에 도착하면 맞아줄 사람도 없었어요. 박옥수 목사님이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다 준비해 주실 거다’라고 하며 우리를 믿음으로 보내셨어요. 말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 곳에 가서 살 것을 생각하니 처음에는 두려웠어요. 그런데 선교 나가기 전에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여호와 이레’가 우리 부부 마음에 임하면서 쉼을 가졌어요.”
 브라질로 떠나기 전, 김범섭 목사 부부는 박옥수 목사와 한 달 동안 미국 전도여행을 다녔다. 마지막 장소가 LA였는데, 그곳 집회를 마치고 박옥수 목사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김 목사 부부는 브라질로 떠날 예정이었다. LA에서 보낸 마지막 날, 앨버커키 교회의 목회자가 전화로 “상파울루 공항에 도착해서 나갈 때 <기쁜소식>지를 들고 나가세요”라고 했다. 그 교회 자매 한 사람이 미장원에 갔다가 손님으로 온 할아버지에게 전도하려고 “어디 사세요?” 하고 물었더니, 딸과 함께 브라질 상파울루에 사는데 아들 집에 잠시 왔다고 한 것이다.
 “자매님이 우리 소식을 알고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돕고 싶어서, 브라질에 도착해 입국신고서를 적을 때 머물 곳의 주소라도 적을 수 있게 하려고 할아버지에게 우리 일을 이야기하며 혹시 주소를 적어주실 수 있느냐고 부탁드렸어요. 그러자 자신은 모른다며 딸 전화번호를 주셨대요. 딸이 전화로 우리 소식을 전해듣고는 남동생을 공항에 보내겠다고 한 거예요.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 우리를 맞을 사람을 준비해 주신 거예요.”
 그렇게 시작된 브라질 선교. 1년이 다 지나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지만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 아이들이 준비해서 찬송을 부르며 크리스마스를 보냈어요. 자동 카메라로 가족 사진을 찍고요.”
 그리고 얼마 후, 한인들이 구원받으면서 그들의 가족들이 연결되어 교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선교 초기에 구원받은 성도들은 옛날 이은재 사모가 구원받았던 때의 한국 교회 성도들처럼 매일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들으며 복음을 크게 여기고 사랑하며 헌신했다. 그들이 밑받침이 되어 브라질 사람들이 구원받아 교회에 더해져 지금은 많은 성도들이 함께 주님을 섬기고 있다.

나를 잡아 일으켜 세우는 교회와 하나님의 종이 있어서
브라질에서 17년을 지내는 동안 하나님이 일하신 간증들이 이은재 사모의 마음에 하나 둘 쌓였다. 브라질에 기적처럼 갔던 일, 10년 만에 불법체류자 사면령이 내려져서 브라질에 간 지 6개월 만에 온 가족이 영주권을 얻은 일, 400평 2층 건물을 아주 싸게 사서 예배당으로 만든 일…. 자신이 가고자 한 길이 아니라 교회가 그 길을 걷게 했고, 그 길을 가는 동안 자신의 한계 밖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났다. 지금도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들을 매일 보며 산다고 이은재 사모는 말한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켜 세우지 않았으면 평생 앉은뱅이로 지냈을 거잖아요. 저도 그렇게 살 사람인데, 저를 잡아 일으켜 세우는 교회와 하나님의 종이 있는 것이 정말 좋아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 길을 걷는다
열 아홉 살에 구원받고 어느덧 35년의 세월을 지나온 이은재 사모. 지난 날들을 돌아보며 마음에 남는 감사한 일이 무엇인지 물었다.
 “계속 이야기했지만, 저는 이 길을 걷고자 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제가 품을 수 없는 마음들을 하나님이 주셔서 이 길을 가고 있어요. 복음을 위해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인도해 주셨어요.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이 삶을 주신 하나님이 감사해요. 이 행복을 누리도록 인도해준 교회가 감사하고요.”
 행복한 인생을 산 것 같냐고 묻자 “그렇죠. 제가 어디서 이렇게 행복하겠어요?”라고 대답하고, 후회 없는 삶을 산 것 같냐고 묻자 “그렇죠. 하나님이 저에게 후회 없는 삶을 주셨지요!”라고 대답하는 이은재 사모.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삶을 사느냐보다, 주님을 뵙는 그날까지 나를 인도하는 교회의 음성을 계속 듣고, 그 앞에서 내 생각을 비우고 교회의 음성을 따라가길 바래요.”

이은재 사모와 이야기하며 마음에 감사가 흐르는 것을 보았다. 부족하고 연약한 자신에게 은혜와 존귀를 더하신 주님을 향한 감사였다. 젊은 날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인생 전체를 감싸고 있는 그 감사가 이은재 사모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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