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행복을 찾았고, 행복을 누린다
이젠 행복을 찾았고, 행복을 누린다
  • 짐 몰러(기쁜소식대구교회)
  • 승인 2015.08.05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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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여기저기 옮겨 다니던 아내가 어느 날 던진 세 가지 질문이 나를 구원의 길로 이끌었다. 그 뒤 하나님은 내가 기대했던 삶을 다 비우신 후 한국의 링컨하우스대구스쿨로 인도하셨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기에 행복한 세계를 만나게 하셨다.

먼저 이 간증을 통하여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친구와 아내를 따라 교회에 걸음을 내디뎠다
난 미국 텍사스 주의 샌안토니오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쯤, 여자 친구를 따라서 미국 침례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목사님은 모든 교인들 앞에서 나에게 ‘먼저 죄인임을 시인하고 모든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한 후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영접하고 침례를 받으면 구원받은 것이다’라고 하셨다. 나는 목사님이 말씀하신 모든 절차를 따라했고, 그렇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성경에 대해서 몰랐고, 천국에 대해 관심도 없었다. 다만 구원받으면 삶이 변한다고 하여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따라했을 뿐이다. 그런데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내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무의미했기에 그 후로는 교회에 가지 않았다.
 여자 친구와 결혼하고 곧 군대에 입대했다. 25일쯤 훈련받고 돌아왔을 때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너무 화가 나서 하늘에 주먹질을 하며 하나님을 원망했다. 1986년에 이혼하고, 1989년에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아내는 결혼하고 2년 후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내가 같이 가자고 하여 나도 아내를 따라서 다시 교회에 나갔다. 아내는 주일마다 열심히 교회에 갔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을 향해 이미 마음을 닫았기에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아내를 보면서 마음이 조금씩 달라졌다. 나도 아내처럼 당연히 봉사하며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부단히 노력했다.

애틀랜타에서 우연히 받은 한 장의 신문
군대에서 10년 가까이 근무하던 나는 군생활이 몹시 싫어져 아내와 상의도 하지 않고 1997년에 제대했다. 나는 경험이 많아서 곧 직장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처럼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결국 1998년에 집을 팔고 조지아 주의 애틀랜타로 이사했다. 지금 돌아보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려고 그곳으로 이끄신 것이다. 당시 내가 살았던 사바나 주에는 기쁜소식선교회 산하의 교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애틀랜타로 이사온 후, 아내는 이 교회 저 교회 옮겨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신앙생활에 한계를 만났다며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어느 토요일 오후, 잔디를 깎고 있는데 집배원이 신문 한 부를 던져주고 갔다. 한국어로 된 신문이었기에 아내에게 건네주었다. 그 신문에는 박옥수 목사님이 전한 설교 말씀이 실려 있었다. 아내는 몇 개월 동안 그 신문을 읽은 후 기쁜소식애틀랜타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하루는 내가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자 아내가 나에게 세 가지를 물었다. 첫 번째는 ‘마음에 죄가 있는가?’ 두 번째는 ‘의로운가?’ 세 번째는 ‘거룩한가?’였다. 나는 “사람이 당연히 죄가 있지, 사람이 어떻게 거룩해?” 하고 아내에게 되물었다. 아내는 씨익 웃으면서 “난 죄가 없어. 그리고 의로워”라고 했다. 나는 순간 ‘아내가 교회를 많이 옮겨 다니더니 미친 게 아닌가?’ 생각했다. 아내는 구원받은 간증을 하면서 그동안 왜 많은 교회를 옮겨 다녔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내에게 “당신처럼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한 사람이 구원 안 받으면 누가 받아?”라고 하며 “당신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었어”라고 아내를 설득하려 했다.

 
“당신, 오늘 죽으면 지옥에 갈 거야”
며칠 후, 아내는 나에게 성경세미나에 가자고 졸랐다. 처음에는 “무슨 한국 교회가 나에게 하나님을 가르쳐 줄 수 있겠어?”라고 하며 갈 필요가 없다고 완강히 거부했다. 그동안 아내를 따라 가본 한국 교회의 모습은 예배 시간에 소리만 질러대고, 예배가 끝나면 식사하고 집에 오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아내는 한 번만 참석해서 진리를 들어 보라고 나를 계속 설득했다. 아내의 모습이 굉장히 진지해서 궁금증도 약간 있었지만, 무엇보다 내가 아내에게 밥을 얻어먹고 살려면 가야 할 것 같아서 참석하기로 마음먹었다.
 집회 첫날이었다. 아내는 ‘이번 집회에서는 당신을 위해 다른 주에서 강사님을 초청했다’고 했다. 설교 말씀이 끝난 후 강사 전도사님은 나에게 아내가 했던 것과 같은 질문을 하셨다. 아내에게 이미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대답했다. 전도사님은 내 대답이 마음 중심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아셨다. 집회가 끝난 후 아내가 전도사님에게 내 마음의 상태를 물었을 때, 전도사님은 “자매님 남편은 몹시 교만하고 자기가 옳다는 생각이 아주 강해서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해요”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날 밤, 집에 오자마자 아내가 나를 붙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앙교제가 어떤 것인지를 알았다. 아내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나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자려고 불을 끄려다가,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당신, 오늘 죽으면 지옥에 갈 거야.” 그러고는 불을 끄고 잠이 들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평소 마음 깊은 곳에서 ‘내가 정말 천국에 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곤 했었기에 아내의 말 한마디가 나를 무서움에 빠지게 했다. 10년 넘게 나와 같이 교회에 다녔지만 아내가 나에게 지옥에 간다는 소리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아내의 말은 큰 충격이었다.
 다음 날, 나는 다시 집회에 참석하기로 마음먹었다. 둘째 날 집회에 참석해서 사울에 관한 말씀을 들었다. 내가 사울처럼 내 생각을 믿고 사는 사람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전도사님과 다시 신앙상담을 했다. 전도사님은 하나님이 보시는 죄의 기준과 내가 생각하는 죄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다. 그동안 나는 내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우리가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하셨다. 성경 말씀에 비춰봤을 때 나는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집회 셋째 날인 2002년 4월 24일, 수요일. 나는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골 2:12~13)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죄에서 벗어나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다.
 구원받은 후, 전도사님은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베드로전서 2장 2절 말씀을 이야기해 주시며, 나에게 복음을 들려준 교회가 나에게 신령한 젖을 공급해줄 교회라고 하셨다. 그 주 금요일에 나는 내가 나가던 미국인 교회 목사님에게 전화를 걸어 ‘나는 구원받았고, 거룩하다’고 말하고, ‘이제 목사님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훗날 나는 그 교회 목사님에게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 영문판을 건네주었다.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지만…
기쁜소식애틀랜타교회에 다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마음에 많은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람은 항상 악하다’는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나를 몹시 혼란스럽게 했다. 특히, 성도들이 삶에 문제가 생기면 목사님이나 사모님을 찾아가 상담하고 그분들의 인도를 받는 것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하는 딸이 교회의 인도를 받는 것을 놓고 나는 아내와 의견이 달랐기에 교회를 향해 더욱 마음을 닫았다.
 우리 부부는 결혼한 지 3년이 지났을 때, 당시 아내가 다니던 장로교회 전도사님의 소개로 18개월 된 예쁜 아이를 입양했다. 정말 행복했다. 아이가 자라면 자랄수록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다. 행여 딸이 동양 아이라고 놀림을 당할까봐 비싼 돈을 주고 사립 기독교 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받고 딸이 초등학년 6학년이었을 때 아내가 딸을 공립학교로 전학시키겠다고 했다. 딸이 복음과 거리가 먼 신앙을 가르치는 학교에 다니는 것이 편치 않다고 했다. 사모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 일로 아내와 많이 다투었고, 결국 아내가 원하는 대로 딸을 공립학교에 보냈다.
 교회를 향한 내 마음의 문이 닫혔다.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나는 목사님을 부를 때 ‘한국 목사님’이라고 했고, 교회는 ‘한국 교회’라고 불렀다. 교회 사람들이 딸에 대해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면 무조건 딸의 말만 믿었다. 어느 누구도 우리 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과잉보호를 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딸의 영혼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이나 교회와 목사님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에 오랫동안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
 몸은 미국인 교회에서 나왔지만 마음은 내 기준을 그대로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으로 교회와 함께할 수 없었다. 나는 너무나 미련했다. 세상에서 배운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시는 교회에 들어와서 살았기 때문이다.
 잘 키워보려고 했던 딸은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게다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나는 좋은 아빠도, 좋은 남편도 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하나님께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아내에게 목사님과 상담하고 싶다고 했다.
 하나님은 내 마음에 교회와 당신의 종을 세우는 일을 하셨다. 이제껏 기다리셨다는 듯이 하나님은 내 삶을 뒤집기 시작하셨다. 잘 다니던 직장이 파업해 다른 직장을 얻었는데, 그곳에서는 해고를 당했다. 7년 사이에 직장을 네 번이나 잃었다. 왜 그런 일이 생기는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하나님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시 127:1)라는 말씀을 가르치시며, 내 마음을 낮추시려고 많은 일을 하셨다.
 나는 고집이 세고 옳음도 강하며 나 자신을 믿는 사람이다. 내가 옳다는 생각이 들면 누구의 말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나의 옳음이 딸을 망쳤고, 오랫동안 아내를 괴롭게 했다. 나는 오랫동안 온실 속 화초처럼 펜대를 잡는 일을 해왔는데, 한동안 막노동을 하며 마음이 바닥까지 내려갔다. 그런 삶 속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향한 미련도 끊게 하셨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은 나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삼단 가방 3개만 들고, 한국으로
2009년 12월에 형제들과 같이 뉴올리언스교회 집회에 참석했다. 박영국 목사님이 집회 강사였다. 집회 기간에 박영국 목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목사님은 한국에서 열리는 영어말하기대회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나는 링컨하우스광주스쿨 학생들이 우리 집에서 홈스테이 했던 일을 말씀드리며,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했다. 목사님이 아주 좋은 생각이라며 “그럼, 교사 자격증을 따 놓으세요”라고 하셨다. “지금은 형편이 좋지 않아서 어렵고요,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고는 그 일을 잊고 지냈다.
 2010년, 애틀랜타에서는 처음으로 그라시아스 합창단이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을 했다. 박옥수 목사님이 애틀랜타에 오셨고, 목사님은 미국인 형제들과 교제를 하자고 하셨다. 그때 내가 전에 박영국 목사님과 나누었던 대화를 말씀드리자, 목사님은 준비가 되는 대로 한국으로 오라고 하셨다. 그 후, 신기하게도 우리 부부가 한국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게 삶이 흘러갔다. 하나님이 우리 삶을 그렇게 이끄신다는 마음이 들어 교사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삼단 가방 3개만을 들고, 2010년 7월 25일 한국으로 향했다.

 
‘하나님은 날 만나고 싶으셨구나!’
한국에 와서 처음 2년은 기쁜소식대구교회에서 살았다. 모든 분이 우리 부부를 잘 대해 주셨지만 자동차가 없어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이 힘들었고,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것도 많이 힘들었다. 특히 날씨가 너무 추워서 힘들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한국으로 왔지만, 어려운 형편들 앞에서 ‘내가 왜 한국에 왔을까?’ 하고 후회도 되었다.
 하루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내가 나에게 행복하냐고 물었다. 나는 너무 슬프고 답답하다고 했다. 그 무렵 그라시아스 음악학교에 다니던 딸이 적응하지 못하고 미국으로 도망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내는 행복하다고 했다. 아내의 말도 이해가 안 됐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행복하다고 할 수 있지?’
 집으로 돌아와 아내는 사모님과 나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형편을 보면 절대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말씀을 보면 행복한 자라고 했다. 로마서 4장 6~8절을 보여주며, 형편이 좋아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죄를 사함받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했다. 그리고 나의 마음에 평안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내의 말이 인정은 되었지만 믿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정말 이 여자가 행복한가?’ 하고 그날부터 아내를 지켜보았다. 아내는 아주 작은 것에도 감사해 하고, 정말 평안해 보였으며, 행복해 보였다.
 딸도 떠났는데, 아내와 다른 곳에 서 있는 나. 자연스레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아내가 마하나임 사이버신학교에 입학하라고 해서 등록하고 매일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씩 배울 수 있었다.
 내가 구원받은 후 13년 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말씀이 ‘어려움은 좋은 것이다. 어려움은 우리 마음을 하나님과 연결시켜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은 좋은 집, 좋은 차, 풍족한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5)
 2014년 여름, 성경에서 위 구절을 읽다가 내 눈에 처음으로 ‘복(영어로는 Happy)’이라는 단어가 보였다. 참 행복과 소망은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전에 나는 늘 내 삶에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런 기도가 잘못된 줄 몰랐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모든 조건이 갖추어지면 나는 하나님이 필요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나는 하나님을 밀어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 하나님은 날 만나고 싶으셨구나!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것으로 살기를 바라셨구나! 나에게 물질적인 것으로 만족하는 삶이 아니라 진정한 소망과 평안을 주고 싶으셨구나!’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난 후 하나님이 왜 내 인생을 어렵게 이끄셨는지,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를 느끼며 감사하고 감사했다.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 미국에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한국에 오기 전에 아버지를 찾아뵙고 복음을 전했지만 안타깝게도 구원받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 일로 내 마음이 많이 무거웠다. 이런 나를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하루 전에 하나님이 어머니에게 맑은 정신을 주셔서 전화로 다시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어머니가 구원을 받고 돌아가셨다. 남동생과 여동생은 아직 구원받지 않았지만, 동생들에게도 복음을 전했기에 하나님이 그들도 언젠가는 구원하시리라 믿는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기에
지금 나는 가진 것이 없다. 그런데 모든 것을 가졌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링컨하우스대구스쿨 교사로 나를 써주시는 하나님이 감사하고, 교만하고 못난 나를 받아준 교회가 감사하고, 나에게 복음을 전해준 교회가 감사하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교회를 대적하고 의심하고 하나님을 원망한 것뿐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왜 날 붙드시고 사랑하시는지 부끄럽고 감사하다.
 딸이 아직 교회에 돌아오지 않았지만, 내가 그 아이를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바랄 뿐이다. 내 삶에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형편과 상관없이 나는 지금 행복하고 평안하다. 나의 소망은 교회 안에서 복음의 일꾼으로 쓰임받으며 사는 은혜를 계속 입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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